[……]인텔리 계층의 미국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인종 차별과 관계 있는 말은 입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유주의자일지라도 지리적으로는 아주 분명하게 차별적인 언급을 한다. 이건 무척 재미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112번지에서 북쪽으로 가면 안 돼요. 그 근처는 위험한 동네니까"라는 식의 말들을 거리낌없이 입에 올린다. 심지어 일부러 지도에 "여기서부터 북쪽으로는 가지 마시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는 가지 마시오"하고 표시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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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과적으로는 112번지로부터 북쪽의 위험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94퍼센트는 예를 들어 흑인일 경우가 있다. 그건 차를 타고 지나가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컨대 "여기에서 더 북쪽으로 (예를 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이 살고 있어 마약에 관련된 살인 사건 등이 자주 일어나니까, 무엇보다도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뜻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지리적인 표현으로 바꿔서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아주 태연하고 명쾌하게 그런 식으로 바꿔 표현하는 걸 보면, 나는 항상 '정말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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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슬픈 외국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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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시기에, 여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불만을 좀 표출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또한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점을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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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만, 이는 대부분 '언어 표현의 수정'이라는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다. 이것은 '완곡어 운동'이라 불리는데, 나는 이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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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곡어 운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많은 '차별 용어'에 대한 금지 및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의 사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는 거의 완전히 정착된 상태로, 예를 들어 대화 중 anyone을 무심코 he로 받으면 바로 주의를 받을 정도다. 성이 Goodman인 코네티컷의 한 주부가 Goodperson으로 바꾼 예조차 있다. 한국에서도 '호모' 대신 '동성애자'라는 용어가 정착되었고, '살색'을 다른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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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운동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에 바탕하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세계가 더 좋아지거나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사피어-워프 가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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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분명 세계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지만,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석의 말대로, "적어도 일반적 수준에서는, 언어가 사고의 흔적이고 세계관의 흔적인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우리의 사고방식을 규정하거나 세계관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완곡어 운동'의 현실적 실효성은 생각만큼 강력하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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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완곡어 운동'은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은폐하기도 한다. 위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저런 방식의 '완곡어'는 실제 흑인들의 생활방식과 문제점을 가린다. 또다른 예로,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장애우'로 바꿔 사용하자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처지는 '은폐'되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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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완곡어 운동'을 포함한 '정치적 올바름'이 급진적으로 나아가서 하나의 근본주의를 형성할 위험성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도살장'은 차별용어이기 때문에(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의 <Slaughter House 5> <5번 도살장>이 아니라 그냥 <슬로터 하우스 5>로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낙태 반대론자가 낙태 수술을 하는 의사를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차별에 반대한다)을 상대방에게 강요함으로써 그것이 또다른 '억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완곡어 운동', 또는 '정치적 올바름' 전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태도'는 분명 권장할만한 것이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다양성'을 억압하고 하나의 '근본주의'로서 자리잡는 경향이다. 그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기존의 소수들을 보호하는 대신 또다른 소수들을 억압하는 것으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고, '완곡어 운동'에 대해 심정적인 지지를 표하는가? 그것은 이미 앞에서 썼던 말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내 사고가 언어의 결과물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 사고의 흔적인 것이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 우리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내 언어를 수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언어가 나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지 않고 '무엇을 사고하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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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완곡어 운동'에 대한 반감은 이해하지만, 그것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인간의 발언은 경멸한다. 자기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뒤에 말하는 것과, 자신의 발언이 내뱉어진 뒤에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상식이 된 요즈음에 이르러서 이런 '합리화'의 경향은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것은 표리부동한 자세로 인해 실제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편견을 편견이라고 인정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쪽은 적어도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또는 실제로 차별하고 있는 것들)을 과대포장하거나 은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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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며, 따라서 어떤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할 기준을 누군가가 (그게 누구든) 갖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치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의 기준에 대해서 고민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다른 것들을 말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내 기준을 굳이 남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자기 자신의 내적 성찰'없이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 '형식적 절차'로 지키거나, 반대로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 '욕망의 억압'이자 '강요되는 구조'로서 반대하는 것을 경멸할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사회의 실제적인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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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페미니즘'을 포함한 '정치적 올바름',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면) "실천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이지, 결코 "공부해야 할 주제"나 사물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준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순서가 바뀌면 그 행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입바른 말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실제로 건강하기만 하다면. 반대로 그 사람이 말을 아무리 건강하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실제로 건강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왜 계속 가난한가를 사회복지사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29년 전 일이 떠올랐다. 가난한 환경에서 가난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성장한 사람들은 중산층 사람들에는 일상적인 일도 난생 처음 겪는 게 된다.
  교육까지 짧으면 배운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비유가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남들 보기에는 사소한 일이지만 당사자는 겪을 때마다 주눅이 든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 다른 환경의 사람들과 섞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서 탈출하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서울 강서방화자활후견기관 사회복지사인 김원중씨는 말했다.[……]

- 서화숙, <고립과 지적 빈곤의 대물림>,『한국일보 2007년 2월 22일 30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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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의 인문학> 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얼 쇼리스는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데, 교도소에서 어느 여성 재소자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하층민들을 위한 인문학 코스를 만들었다. 그것이 1995년 만들어진 '클레멘트 코스'이다. 이 발상은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성공회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가 그의 교육과정을 도입해 2005년부터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성프란시스대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애초에, 이 발상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노숙인에게 무슨 인문학이며 학문인가, 차라리 빵을 하나 더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지금도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밥그릇을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인데.
  그런데 이 칼럼을 보면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무엇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노숙인이나 하층민들의 고질적인 문제는, 그들이 무언가를 시작할 능력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기존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나 확신은 내부에서 스스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교육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통념처럼 빈민들이 더 나은 생활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장벽은 단순히 '자본'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중산층(우리나라의 비정상적 중산층이 아니라 통계적 중산층)의 생활양식이 낯설고,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의식주 또한 다르다. 거기에서 오는 위화감과 격차는 그들을 주눅들게 만들고, 다시금 생활의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성 성공센터 W-ing의  박지영 사무국장은 이런 일화를 전한다. "노숙인이었던 우리 학생들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란 말을 배웠어요. 한번은 학생들끼리 다툼이 생겼는데, 누군가가 욕을 하자 한 학생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잖아. 네가 욕하면 사람들이 너를 그런 사람으로밖에 안 보는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때 느꼈죠. 아, 배워야 하는구나."
  이 일화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층민이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 계층이 다른 계층에 진입한다는 것은, 곧 그들이 다른 생활양식에 적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양식은 물질적인 조건보다는 정신적인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이 더 강하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정신의 재교육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위화감'과 '격차'라는 것을 과연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중산층인가 하층민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는 어떤 복장을 차려 입어야 하느냐, 또는 어떤 음식에 무슨 와인이 좋은가라는 문제에 무지한 것을 하층민들의 '위화감'과 '격차'라고 떠올리는 사람은 중산층이다. 빈민이 정말로 자신의 '신분'을 재확인하고 움츠러드는 경우는 대화 속에 튀어나오는 외래어, 대중적 뮤지컬 공연장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의 문제, 레스토랑에 갔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쥐느냐의 문제이다. 한국에는 의외로 자신들이 '하층민'이라고 착각하는 '중산층'이 꽤 많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좀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독거초등학생



나는 그 소녀를 독거초등학생이라 부르련다
신문지상과 방송에 사회문제로 오르내리는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본따서

소녀는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
단칸 셋방에 할머니와 둘이 산다
병중이던 할머니 2개월 전 돌아갔다
엄마는 집 나간 지 오래
아버지는 5년째 교도소 수감중
할머니 돌아가자마자 동사무소에서는
매달 지급해주던 생계보조비를 끊었다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는 것
보호자가 어쨌든 생존해 있으므로
소녀는 자격이 없다는 것
법이 그렇다는 것

그러든지 말든지, 소녀는 그런 따위는 몰라. 다만 이제 자신이 어엿한 독거인이 됐다는 것. 이 광막한 우주에 홀로 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됐다는 것은 아는 것 같다. 보라.

밥 짓는다
바가지에 쌀 씻어 밥솥에 안친다
방 청소한다
빗자루로 쓸고 쓰레받기로 받는다
옷 빨래는 대야에 넣고
비누질 찰싹찰싹
이웃이 넣어주고 간 밑반찬에
저녁밥 올려 먹고
깜깜해져 오네 불 켠다
형광불빛이 깜박깜박 깜박깜박 깜박, 다섯 번 만에 들어온다
엎드려 공책 편다
연필 꼭꼭 눌러 쓰기 숙제를 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책가방 속에 잘 챙겨넣는다
이부자리 편다 베개 올려놓고
마지막 형광등 스위치를 탁, 내린다
불이 꺼지고
눈이 꺼지고
몸이 꺼져……

……아, 꺼져요. 하지만 나는 소녀가 무엇보다 형광등 불 켜고 끄는 일을 좋아할 거라고 상상한다. 쉽고, 무슨 놀이 같기도 하고. 탁 내리면 환했었는데 얼른 깜깜해지고. 톡 올리면 깜박깜박 다섯 번이나 술래놀이처럼 하다가 화화화 화안해지고.
저 멀리 장수에서 산다는 소녀의 일을 신문 하단 몇 줄 기사에서 본 후로, 그곳으로부터 흔들려 오는 빛과 소리를 자꾸 느낀다. 몇 차례 곁인 듯 파고드는 가늘은 그것. 빛과 소리. 몇 날을 번갈아 왔다갔다하더니 어느 하룻날은 둘이 함께 왔다.

소리 - 플라스틱통 같은 데서, 플라스틱 컵일지, 쌀을 한 컵 또는 두 컵 떠내는 소리. 역시 플라스틱 바가지일지, 떠낸 쌀을 담아 물 받는 소리. 조물조물 씻는 소리. 마지막 물 속 쌀알이 차륵이는 소리.
빛 - 파르르파르르 파르르파르르 파르르, 다섯 번이나 떨리다 들어오는 소녀의 방 형광들불. 펼친 공책 위에 새하얗게 깔리는 형광불빛. 형광불빛의 잔디밭. 잔디밭 위에 엎드린 소녀. 꽃 나무 나비가 모이는 공책 칸칸마다 또 파르라니 쏟아지는 잔디.

그런데, 독거노인이라고 들었을 때는 밭은기침, 세발 수발, 오물 수발, 간병, 말벗 등의 여러 말이 으레 떠올라와 주는데, 독거초등학생이라고 불러봐 보니 아무, 아무 떠오르는 게 없다. 독거초등학생이라는 이름은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할수없게 하는 이름인가 보다. 생각이 막히는, 막혀버리는 그런 이름은 본따 짓지도 부르지도 말아야 하는가 보다.

나는 그 소녀의 독거초등학생이란 이름을 지우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딴 이름 지워지자마자 소녀는 저 아득한 우주 꽃씨로 잠들었다. 우주 어둠이 내려와 펼쳐진 채인 소녀의 알림장 보호자 확인란에 별을 박았다. 빛나는 우주 사인을 했다. 소녀 잠들기 직전 소녀의 꽃손을 빌어 쥐고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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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