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본'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고민을 했고 다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책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 아닌가?" 사실 그렇지는 않다. 요즘 월 스트리트에서 꽤 잘 나가는 게 '자본'이라고 한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즈에서는 '신 자본주의'를 특집 기사로 전하면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은 현재를 설명할 수 있는 책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자본'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보완하려고 했다. 적어도 내가 읽어본 바로는, '자본'의 이론은 100% 완벽하게 현대의 현실을 설명해줄 수 없다. 그것은 시대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필멸자인 인간의 산물로서는(그것이 사상이나 분석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인 것이다. 맑스는 우리 시대를 경험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결국, 나는 밑에 쓴 글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맑스의 저작이 단지 '사회학 서적'으로만 읽히지 않는 것은, 그가 철학적인 자세로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현대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 관한 실마리이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속속들이 해부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일정 부분에서는 그러한 역할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는 헤겔의 관점을 이어받아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했고, 그것은 그의 저작 '자본'에 매우 잘 드러나 있다.
  만일 세상에 나온지 100년이 훨씬 지난 서적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국부론'을 그렇게 읽지 않으며, 아담 스미스의 주장에서 무엇이 틀렸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맑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정될 수 없는 신적 존재가 아니며, 그의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다만 그가 말하는 것 중에 무엇이 우리에게 쓸모있는가를 찾으면 그만이다. 그것은 100년도 넘은 니체의 철학을 우리가 아직도 읽고 있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무엇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가 - 그것은 당시에도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며, (100년이 됐든 1000년이 됐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책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A.J. Ayer는「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라는 책에서 형이상학을 철학으로부터 제거하려고 했다. 물론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그를 비롯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잘못은 그들이 하려고 한 일들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철학을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동일한 확실성을 갖추게 하고 싶었다(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발상에 대해 질겁했지만). 그런 작업이 실패한 이유는 철학이 그런 '언어의 확실성'을 확립해주는 학문, '개념을 명확히 하는 작업'으로 한정되었을 때 다른 학문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다른 학문과 두드러지는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 '가치'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다.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다. 철학은 네가 '참'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것이 철학의 겸손함이며 동시에 위대성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철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무엇을 '참'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물리학이 E=MC²의 공식을 만들면, 철학은 그 공식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즉 원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다른 학문과 구별되며, 동시에 존속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옮겨 적은 뒤의 추기 : 지젝은 저 말을 한 비디오에서, 이런 말을 한다. "지구를 멸망시킬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려 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그때 철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장 그 운석을 멈추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이 말은 철학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문제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철학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더이상 철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과학이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은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물리학은 물리 현상을 설명한다.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맑스는 "많은 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오래전에 말했는데, 이 말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다. 어떤 과학도 - 그것이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 '무엇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동시에 특권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랜만에 미니홈피를 돌아다녔다. 다들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일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monologue이다. 전파에 실려 세계로 발신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dialogue이다.
  그들이 왜 쓰는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그런 독백-대화를 쓰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이다.
  내면의 고백, 그것은 그 자체로 치유의 기능을 한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얻는 쾌감은 다른 이의 반응을 통해 배가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는 글은 의미가 없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의미가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나로서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공개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없을 뿐더러, 내 독백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옹호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부유하는 아포리즘과, 김수영의 산문이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게 전자는 길거리의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의 휴지조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나 스스로 쓰레기를 생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추기 : 모월 모일의 단상이라 함은, 내가 사용하는 수첩에서 옮겨 적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위에서 쓴 것처럼, 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글은 이 '독백' 게시판에조차 옮겨 적지 않는다. 그런 건 그냥 혼자 두고 보면 될 일이다.

2007/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