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을 하고 있다. 데이타베이스 구축이라는 작업인데, 말은 거창하지만 한마디로 하루종일 앉아서 컴퓨터를 만지는 것이다. 배워야 할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요는, 정말로 출근한 뒤부터 퇴근할 때까지 10시간 가까이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업무 시간에 나는 거의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잠깐 짬이 나면 인터넷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게 고작이고, 업무가 밀려 있을 때는 정말로 다른 일을 하거나 내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내 앞에 있는 것은 해 나아가야 할 업무들 뿐이고, 그 밖에 다른 것은 없다. 다른 일을 하려면 일단 이 일을 그만둬야 한다. 늘어가는 것은 타자실력이고, 줄어가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이런 노동의 양상은 이 시대에 이르러 보편적인데, 예전에 제조업 분야의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비참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육체노동자들 - 건설현장에서부터 미싱에 이르기까지 - 이 '너무 피곤한 몸 때문에'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면, 현재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너무 피로한 정신 때문에' 그들 자신에 대해 성찰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개인을 개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조직 - 또는 구조 - 를 위해 써야 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불행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말대로,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유난히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양상은, '노동 불안정의 정당화'이다. 이 시대는 노동의 불안정성이 이전의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강한 시대인데 - 그런 이유 때문에, 마르크스의 말대로 이 시대의 지배계급은 지배계급의 자격이 없다 - 그 불안정성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로 재편되고 있는 경제질서 속에서, 이 시대의 주류가 내놓는 설득의 카드는 굉장히 이분법적인 것이다. "불안정한 노동을 선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낙오한 실업자가 되거나!" 여기에 '불안정한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없다.
  이 이분법적인 선택지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선택의 폭을 좁히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이 '노동의 불안정성'을 '인간의 자유'로 포장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이런 형식으로 나타난다. "너에게는 세계를 무대로 일할 기회가 주어져 있다. 이제껏 좁은 국내 시장에서 일하던 너의 노동력을 세계 시장에 내놓고 팔 수 있다. 다만, 니가 그럴 능력이 있다면. 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선택하라!"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순식간에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낙오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이런 자본의 화법은 나에게 나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가. 그 어느 곳보다도 자유가 없는 곳에서 하는 노동이,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기만. 그곳에서의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누구도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 노동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인간은 항상 따로 있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그 인간은 바로 독일 나치주의자들이었다. 생각을 약간 바꿔 보라. 당신은 과연 누구를 위해 노동을 하는가? 정말 나 자신을 위해서인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서인가? 160여년 전에 탁월한 한 학자가 말했듯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 주류의 생각은 절대로 당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

김수영

일상만담 2006/07/17 12:34
  며칠 전에 친구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산『김수영 전집 2-산문』의 개정판이 도착했다. 내가 제본이 떨어질 정도로 읽었던 건 개정 이전의 것이었기 때문에 한번 훑어보았다. 개정판에 새로 추가된 글이 없었다면 아마 훑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읽지 않은 글들이 있었기에 선물용으로 구입한 책을 들춰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물받을 사람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개정판에서 바뀐 것은 새로 실린 글만이 아니다. 원고를 현재의 맞춤법에 맞추어 쓰고, 한자를 한글 뒤에 괄호로 병기했다. 나로서는 한자를 병기한 개정판보다는 그대로 써버린 예전 판본이 심정적으로 더 와닿지 않나 생각하지만, 우리 세대가 쉬이 읽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튼튼한 하드커버에 새로운 글도 실려 있으니 나도 한 권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3년에 첫출간되었으니 이렇게 호들갑 떨 일도 아니지만.
  새로 읽은 글들은 역시 김수영의 글이었다. 도서관 구석에 처박힌 너덜너덜한 옛 신문에, 저자의 이름도 지워진 채 실려있다 하더라도 그의 글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김수영의 냄새를 폴폴 풍기고 있었다. 다시 훑어보면서 떠오른 사람은, 김수영이 아니라 장정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 사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간단한 - 있다.

  예전에 어느 글에서도 썼는데, 장정일의 에세이에는 김수영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거절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에게 있어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건 30분을 요하는 작업이다.

  10분 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운다.
  5분 동안 손을 씻는다.
  15분 안에 김수영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간다.

  나는 이 글을 읽고나서 줄곧, 장정일은 김수영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 대해서든 '30분 안에 쓸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지 못한 채' 글을 쓰는 것이 두려워서 청탁을 거절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개정판에 새로 실린 글들을 읽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게 아니었다. 그는 김수영에 대한 글이었기 때문에 청탁을 거절한 것이다. 장정일에게는 아마도, 김수영에 대한 극도의 애정과 같은 것이 있었으리라. 30분만에 쓸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알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30분만에 써버릴 수 없는 그런 애정이. 그래서 그 청탁을 애써 거절한 것이리라. 김규항이『신약성서』와 김수영의 산문집을 (그에게 있어) 동등한 위치에 놓는 심정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다, 김수영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불꽃이다. 그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

주말의 풍경

일상만담 2006/06/25 00:07
  1
  오늘은 하루종일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경증적인 증상. 가슴은 자꾸만 답답해지고, 머릿속은 실타래가 얽힌 것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아무 생각없이 집에 오면 씻고 자기 바쁜 평일의 생활에서 하지 못했던 고민들을, 주말이 되면 몰아서 하게 되는 것만 같다.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2
  그래서, 가끔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은 필요할 때 없다는 것도 느낀다. 이건 물론 다른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의 무게도 어디까지나 내 것이다.


  추기
  조용하면 도지는 이 미친 정신병. 제대 후 나라는 인간이 스스로 정리될 때까지 아무도 안 만나기로 했고 또 거의 완벽하게 그것을 실천한 결과가, 요즘에서야 드러나고 있다. 너는 이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