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사회 각 분야의 상대성 열풍이 나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가장 저질의 상대성은, 예로 들자면 인터넷의 토론(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싸움)같은 것이다. 세상 만사 상대적인 것이니, 너도 옳고 나도 옳고, 결국 그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는 게 바로 그렇다. 양비양시론처럼 어떤 근거나 논리조차 내세우지 않는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 결국 모든 게 옳다는 단순한 판단. 이것은 내 죄책감이나 책임을 덜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규준이 되는 가치는 애초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대로,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치판단을 할 때 필요한 규범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자기요청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굳어지면 공동체의 규범이 되고 격률이 되고 성문법이 된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꼭 필요한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아무런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기존에 사회를 얽매었던 다양한 관습과 굴레들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 문제와 별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판단은 뗄레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행동을 행동 그 자체로만 보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행동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로 인해 '무언가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살인의 경우. 이때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우리는 한 인간이 사회에서 소멸된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때 강요된 관습과 도덕률에 얽매이는 것은 거부해야 할지 모르나, 나 자신의 판단 근거까지 없어질 수는 없다. 그것이 칸트가 말한 '내 마음의 도덕률'의 참된 의미이다. 그는 습속을 내면화하라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판단 기준을 세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칸트 철학에서 정언명법으로 표현된다.
이런 당연한 명제에서 출발해, 나는 지젝을 지지한다. 그가 스탈린을 말하는 것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어떤 '사회적 기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포스트 모던과 가치 붕괴가 심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기 위한 기준이다. 지젝의 예를 빌리면, '자율적인 포스트 모던 아버지'와 '엄격한 근대적 아버지'이다. 그리고 아이가 훨씬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이다. 물론 이런 예는 지젝의 발언을 그 맥락에서 살펴야 오해없이 이해될 수 있겠지만.
어떤 일이든 시작될 때의 의도와 목표를 끝까지 지켜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사라지거나, 목표를 달성한 뒤 과대 팽창한다. 현대의 가치 붕괴는 후자에 가깝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했는데, 이 시대는 그것의 별로 좋지 않는 변형으로 되어가고 있다. 근대의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푸코를 필두로 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무의미한 논의로 바뀐 '가치판단에 대한 회의'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말 모든 것에 대한 판단기준이 없을 때 벌어질 일들을, 그들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인가.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모두 나쁘다고 말할 때,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