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 Ayer는「언어, 진리, 그리고 논리」라는 책에서 형이상학을 철학으로부터 제거하려고 했다. 물론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그를 비롯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잘못은 그들이 하려고 한 일들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철학을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동일한 확실성을 갖추게 하고 싶었다(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발상에 대해 질겁했지만). 그런 작업이 실패한 이유는 철학이 그런 '언어의 확실성'을 확립해주는 학문, '개념을 명확히 하는 작업'으로 한정되었을 때 다른 학문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다른 학문과 두드러지는 유일한 차이는, 그것이 '가치'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다.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다. 철학은 네가 '참'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것이 철학의 겸손함이며 동시에 위대성이기도 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철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무엇을 '참'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물리학이 E=MC²의 공식을 만들면, 철학은 그 공식에서 파생되는 것들이 (즉 원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다른 학문과 구별되며, 동시에 존속할 수밖에 없는 학문이다.
옮겨 적은 뒤의 추기 : 지젝은 저 말을 한 비디오에서, 이런 말을 한다. "지구를 멸망시킬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려 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그때 철학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장 그 운석을 멈추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이 말은 철학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으로 싸워야 하는 문제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철학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더이상 철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과학이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은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물리학은 물리 현상을 설명한다.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맑스는 "많은 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오래전에 말했는데, 이 말은 사회학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다. 어떤 과학도 - 그것이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 '무엇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동시에 특권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랜만에 미니홈피를 돌아다녔다. 다들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일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monologue이다. 전파에 실려 세계로 발신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dialogue이다.
그들이 왜 쓰는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그런 독백-대화를 쓰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이다.
내면의 고백, 그것은 그 자체로 치유의 기능을 한다.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얻는 쾌감은 다른 이의 반응을 통해 배가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쓰는 글은 의미가 없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의미가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나로서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공개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 없을 뿐더러, 내 독백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옹호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부유하는 아포리즘과, 김수영의 산문이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게 전자는 길거리의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의 휴지조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만, 나 스스로 쓰레기를 생산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추기 : 모월 모일의 단상이라 함은, 내가 사용하는 수첩에서 옮겨 적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위에서 쓴 것처럼, 나는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글은 이 '독백' 게시판에조차 옮겨 적지 않는다. 그런 건 그냥 혼자 두고 보면 될 일이다.
'죄와 벌'을 읽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타락 - 구원의 구조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주의(까뮈의 입장)적 관점에서 한 인간의 희망을 배제한(절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선택과 그것이 현실 속에서 망가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에서든 후자의 관점에서든, 작품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갱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前者는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답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後者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후자의 관점을 택한 이는 작품 후반의 '갱생'을 근대 소설의 한계로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냉소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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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다'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말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별다른 불편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번역서'는 온전히 한국어여야만 한다. 번역된 문장은 올바른 한국어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물론 나는 어쩔 수 없이 쓰는 번역 술어들까지 고쳐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역자의 게으름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모두 동의할테지만, '한국어는 허용하지 않는' 문장형식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においてはそれは'라는 문장은 일본어에서 가능하지만, '~에 있어서는 그것은'이라는 한국어 문장은 가능하지 않다. 이 경우에는 앞의 조사를 제거해야 한다.
일본어 번역은 語型과 순서가 비슷하기 때문에 오역의 문제가 크지 않지만, 그만큼 번역의 성실성이 요구된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일기'라는, 눈 뜨고 읽을 수 없는 책 때문이다.
수정: 이 책은 이런 걸 따지기 이전에, 불성실하다. 너무도 불성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