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을 읽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타락 - 구원의 구조로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존주의(까뮈의 입장)적 관점에서 한 인간의 희망을 배제한(절망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선택과 그것이 현실 속에서 망가지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에서든 후자의 관점에서든, 작품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하는 라스꼴리니꼬프의 갱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前者는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답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後者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후자의 관점을 택한 이는 작품 후반의 '갱생'을 근대 소설의 한계로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냉소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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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번역되기 이전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다'라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말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은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별다른 불편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번역서'는 온전히 한국어여야만 한다. 번역된 문장은 올바른 한국어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것이다.
  물론 나는 어쩔 수 없이 쓰는 번역 술어들까지 고쳐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역자의 게으름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모두 동의할테지만, '한국어는 허용하지 않는' 문장형식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においてはそれは'라는 문장은 일본어에서 가능하지만, '~에 있어서는 그것은'이라는 한국어 문장은 가능하지 않다. 이 경우에는 앞의 조사를 제거해야 한다.
  일본어 번역은 語型과 순서가 비슷하기 때문에 오역의 문제가 크지 않지만, 그만큼 번역의 성실성이 요구된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일기'라는, 눈 뜨고 읽을 수 없는 책 때문이다.

  수정: 이 책은 이런 걸 따지기 이전에, 불성실하다. 너무도 불성실하다.

2007/03/11

  1

  경제학에 대해서 최근 생각한 것.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노동의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자유주의 경제학(주류 경제학)은 상품이 유통되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노동가치와 임금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의 노동을 100% 교환가치로 전환했을 때보다 항상 적다'는 것이다. 자본이 상품을 만들 때 드는 비용은 '고정 비용'과 '비고정 비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계의 유지/보수나 건물의 임대비용, 세금, 유통비용 같은 것들은 고정적이므로 쉽게 줄일 수 없다. 결국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그것이 본래 받아야하는 가치보다 덜 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논리가 노동권의 신장에 주된 역할을 했으며, 나 역시 이것이 잉여가치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상품'의 '수요-공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의 구조'는 이 속에 자연히 포섭되는 것이다. 소비자의 수요가 있고, 그에 따라 가격은 조정된다. 그리고 그 가격에 따라 고정비용을 제외한 나머지가 노동자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나 또한 이 논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다시 이 지점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노동자의 임금'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탄력을 갖게 된다면, 자본가는 순수하게 시장의 균형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시장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밀턴 프리드먼 같은 - 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그것에 조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약한 인간이 다른 강한 인간에게 무릎 꿇는 것이 반드시 인간의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유택은 경제학과 교수이다. 그는 항상 '경제학은 인간의 학문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경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경제는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 당위로서가 아니라 연역적 추론으로서 - 강하게 요청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거기에는 동물과는 다른 방식의 무엇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데에 나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2

  뉴턴은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의 두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밝혀졌듯이, 뉴턴의 근대적 과학연구는 그의 생애에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대부분 전념했던 것은, 연금술과 그노시스(gnosis, 영지주의) 연구였다. 그는 '최초의 근대인'보다는 '마지막 중세인'이라는 말에 더 걸맞는 사람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줄곧 자신이 기대했던 문학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주된 논지는 문학이 지금까지 맡아왔던 책무를 이제는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문제가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문학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로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나는 이 논리에 대해 아주 강한 회의를 품고 있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하루키는 '근대문학에서 벗어난 첫번째 세대'라기보다는 '마지막 근대문학자'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말하는 이른바 '근대문학'의 특징이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의견의 표출인데, 하루키는 그것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교묘하게, 지금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진행시키고 있을 뿐이다.
  하루키를 '처형'했다고 하는(김춘미 교수) 고모리 요이치의 글은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하루키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드 와이드 웹(WWW)과 동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어필하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고진의 말대로 국가와 자본, 네이션의 운동은 끝난 게 아니며 오히려 지속되고 있다. 문학이 만약 그 임무를 맡는다면,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틀을 '형식'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문제의식'에서는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국가와 자본의 운동에 극히 강하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하게 읽힌다고 해서 반드시 소프트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독자의 문제의식이 소프트한 것에 불과하다.

2007/03/08

  문득 떠오른 단상. 이런 건 까먹기 전에 써야 오래도록 남고, 또 나중에 잘 정리해서 쓸 수 있다.
  내가 아직 군에 있을 시절에 썼던 글 중에 <'탈근대적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경제구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는 아직 근대 - 제국주의와 약탈과 정복을 기반으로 한 - 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으며, 그 구조는 오히려 점점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자연사적 필연은 '공산사회로의 이행'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견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탈근대' 논의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절대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풀만 먹는 호랑이'라는 말과 똑같다. 그런 것은 아직 등장한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읽으면서,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가 탈근대 사회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지만, 그리고 또 그것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무력화(無力化)되기 때문이다. 그게 왜 현실에서 무력화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자본주의 문제의 해결 없이, 우리는 근대와 그것의 폐해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없이 추구하는 이상(理像)은 결국 그냥 공상으로 끝나기 쉽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데, 그 '생존'의 문제가 매여 있는 한은 '이상의 추구'도 '탈근대화'도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줄에 묶인 개가 아무리 멀리 벗어나려 한다고 해도 다시 개줄이 묶인 말뚝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의 성립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그 궤를 같이 했으며, 그 성장 또한 함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탈근대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 탈근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들을 믿지 말라.

2007/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