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른 단상. 이런 건 까먹기 전에 써야 오래도록 남고, 또 나중에 잘 정리해서 쓸 수 있다.
  내가 아직 군에 있을 시절에 썼던 글 중에 <'탈근대적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경제구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는 아직 근대 - 제국주의와 약탈과 정복을 기반으로 한 - 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으며, 그 구조는 오히려 점점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자연사적 필연은 '공산사회로의 이행'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견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탈근대' 논의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절대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풀만 먹는 호랑이'라는 말과 똑같다. 그런 것은 아직 등장한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읽으면서,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가 탈근대 사회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지만, 그리고 또 그것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무력화(無力化)되기 때문이다. 그게 왜 현실에서 무력화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자본주의 문제의 해결 없이, 우리는 근대와 그것의 폐해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없이 추구하는 이상(理像)은 결국 그냥 공상으로 끝나기 쉽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데, 그 '생존'의 문제가 매여 있는 한은 '이상의 추구'도 '탈근대화'도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줄에 묶인 개가 아무리 멀리 벗어나려 한다고 해도 다시 개줄이 묶인 말뚝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의 성립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그 궤를 같이 했으며, 그 성장 또한 함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탈근대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 탈근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들을 믿지 말라.

2007/01/13

  저번 주말에 도서관을 갔는데, 그 김에 '현대문학' 6월호를 찾아내어 유종호 씨의 특별기고를 읽었다.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하루키 현상과 무엇무엇의 몰락'이던가, 뭐 그런 식의 제목이었다.
  유종호 씨가 그런 글을 썼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들춰보았는데, 정말로 하루키의 글에 대한 일반적인 폄하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주요 요지를 말하자면 자기가 한국 대학생들의 문학 취향을 10년 가까이 조사해왔는데, 요즘들어 일본 작가의 비중이 높아지고 그 중에 특히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나보다. 그런데 그 소설은 대중문화의 편린 같은 것이고 허섭 쓰레기 같은 문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단다. 이전의 수준높은 문학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이런 문학들이 자꾸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이런 문학은 아직 '계몽되지 않은' 독자들에게 읽혔을 때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도 말한다.
  (내가 요약을 일방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글의 내용을 온전히 요약했을 때 저런 식의 발언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다)
  그의 그 '특별기고'라는 것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반성이 전혀 없다. 왜 이 시대의 학생들이 일본 소설에 열광하게 되었는지, 그 중에서도 어째서 하루키인지에 대한 사회적·구조적 분석이 전무하다. 그냥 쉽게 읽히니까 너도나도 읽는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2차대전 즈음에 베스트셀러였던 데미안은 쉽게 읽히니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 아니면 이전 세대에 비해 이 세대의 문학 수준이 대폭 낮아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글을 읽어보면 바로 그런 의미의 말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이 시대의 문학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 그런 문학은 '문학도 아니라는' 것. 유종호 씨의 글은 그런 의도로 읽힌다. '계몽되지 않은 독자'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문학 수준(이라는 게 있다면)의 기준을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본질적인 의문을 담고 있으며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삼는다면, 나 역시 그의 발언에 동의한다. 이 시대의 독자층은 확실히 이전 시대에 비해 좀 덜 어렵고 쉽게 읽힐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대중'의 범위와 규모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우리나라 독자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내려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문학자들, 특히 비평가들이라는 사람은 왜 이렇게도 문학 이외의 매체에 대한 고민이 전무한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문학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대중적인 문학이 왜 인기 있는가가 아니다. 본래 대중은 대중적이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글쓰기를 선호하기 마련이고, 그건 여타 다른 매체에서도 다르지 않다. 대중은 대중적인 것을 선호하기에 대중인 것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 집단을 우리는 대중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문학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왜 읽히지 않는가이다. 왜 문학은 읽히지 않는가? 이 전반적인 상황 자체를 규정해야 한다. 팝적인 글쓰기를 '상품'이라고 친다면, '상품'이 아니라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은 왜 읽히지 않는가? 그런 범위를 최대한 넓게 적용했을 때조차 읽히는 규모가 점점 줄어들어만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당연하게도, 유종호 씨가 한창 팔팔할 때에 비해서 다른 할 게 많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시간이 남아돌 때 할 수 있는 건 책읽기 밖에 없었다. 다른 건 당구를 치든 롤러스케이트를 타든 밖에 나가야 하는데,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책읽기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읽기가 여가의 매체로서 가지는 힘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도 할 게 너무너무 많다. DVD도 봐야 하고, 웹서핑도 해야 하고,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뮤직비디오를 감상해야 한다. 책처럼 지루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며 중간에 중단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매체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먼저 고민하지 않고 독자의 수준 운운하는 것은 비평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하루키의 글이 과연 '퇴폐적이고 무의미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아마 유종호 씨는 하루키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연구해보지 않은 듯 하다. 하루키에 대해 꽤 깊은 식견을 갖고 있는 동료 비평가 남진우 씨에게 조금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것을. 쉽게 읽힌다고 그냥 그렇게만 판단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작가가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지에 대해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의 문학을 섣불리 말하는 사람을 비평가라고 불러도 될까?

2006/12/15
  나는 아직 '자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공산당 선언'을 통해서 알게 된 단편적인 것 몇 가지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 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산력'과 '소유관계'에 대한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가 폐지를 주장한 것은 '사적 소유'인데, 이것은 나이든 사람들이 헐뜯는 것처럼 '그냥 부자들이 눈꼴시러워서' 주장한 게 아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사적 소유관계'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이, 현대의 급속하게 팽창한 생산력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는 반복되는 활황-불황의 문제를 들고 있다. 너무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는데, 그 생산된 물건은 '사적 소유'로 모두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 다른 말로 하자면 '사적 소유'로 인해 제한되어 필요한 물건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 잉여 생산물이 과도하게 축적되고 그것이 공황을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적 소유의 폐지'만이 현대 사회의 괴물같은 생산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공산당 선언'에서 이 내용은 "지하 세계에서 불러낸 괴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된 마법사 같은 꼴"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 빈부의 차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문제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가정해야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데, '사적 소유'라는 관계가 부의 편중을 초래하는 구조적인 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시대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그 뿌리를 파헤쳐보면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유방임주의'의 또다른 표현이 '신자유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자의 핵심적인 결과는 '극심한 빈부의 차'와 '시장의 실패'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결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저에 있는 심리적인 지지틀이 '제국주의'라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애덤 스미스 시절의 제국주의는 '다수의 제국'과 '눈에 보이는 식민지 통치'라는 방식으로 성립되었지만, 이 시대의 제국주의는 '하나의 제국(미국)'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문화, 식료품, 공산품 등등) 식민지'로 성립되어 있다.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 세계가 단일한 구성체에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대공황과 같은 사태가 다시 한 번 벌어진다면, 그때 전세계는 심각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대한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일부 설명해준다. 미국의 힘은 국방력이나 국토의 광대함, 세계 자본의 집결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전 세계를 먹여살리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문제는 세계의 경제 문제가 되어버리고, '플라자 합의' 같은 일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미국 타도'라는 구호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미국이 당장 망하기라도 한다면, 이후의 진행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3차 세계대전을 논하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수정이나 전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 부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이 세계는 어떤 하나의 이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닌 것이다.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2006/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