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기에, 성의를 갖추고 논쟁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졌기에 글을 씁니다.
제가 지X 씨의 문제제기에 대해 줄곧 취해 온 입장은, 지X 씨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X 씨의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비문이 많고 내용의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지X 씨가 올려주신 페이퍼와 새로운 답글들을 읽고, 조금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X 씨의 문제제기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들인 시간의 대부분을, 저의 논리를 가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X 씨의 의견을 정리하는 데 써야만 했습니다. 정리된 형태의 글이 아니라 답글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는 생각의 조각들과, 올려주신 페이퍼에 있는 내용을 '추출'해서 지X 씨의 주장을 구성하는 데에 꽤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지요. 박사과정 중이시니 바쁘신 거야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써서 글을 써주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들었습니다.
지X 씨가 던진 질문을 재구성해서 압축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a) 제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힘'에 대해 누군가 글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 세계질서라는 것이 혹은 세계평화라는 것이 '힘'에 의한 정치이고, 그렇다면 '한국'이 지향하는 것은 그런 '힘'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는 것인지, 그런 식의 세계질서체계를 수정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국제정치에 대해 쓰고, 그 다음에 지X 씨의 의견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국제정치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앞의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듯, 국제정치에서 '힘(Power)'라는 것은 "자식의 목적이나 목표를 실현하는 능력"입니다. Robert Dahl은 "없다면 하지 않았을 일을 타자에 대해 시키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이쪽이 움직임으로써 상대가 했다면, 이쪽은 상대에 대해 힘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이런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보통은 '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누게 됩니다. Joseph Nye는 이 '힘'을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로 나누고 있는데, '하드 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의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힘, '소프트 파워'는 문화나 학문, 스포츠와 같이 '간접적인 효과'를 가지는 힘입니다. 이러한 '힘'의 정의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Balance of Power'(세력균형) 이론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사람들이 폐기되어야 할 이론이라고 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제정치의 구도와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요. 그리고 또, 많은 것들이 변한 현대사회에서도, 'Balance of Power' 이론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Balance of Power' 이론은 대충 갖다 붙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의미가 왜곡된 경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힘'이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함축적으로, 바로 그 '세력균형'이 국제질서의 평화를 유지해준다는 것이지요. 'Balance of Power'가 정책에 대한 용어가 되면, "어느 국가가 압도적 우월을 달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하는 정책을 의미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이나, 미·소 냉전시대 미국의 정치(7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Balance of Power' 이론의 신봉자였지요)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런 '정의'와 '정책'이 작동하려면,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① 국제정치의 구조는 무정부적 국제 시스템이다
② 국가는, 자신의 독립을 지고의 것으로 간주한다
1번은, 국제정치가 국내정치처럼 정부가 구성되어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진은『윤리 21』에서 이미 이렇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칸트의 생각으로는 법은 바로 도덕성의 실현이 어렵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제법은 그 전형이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도덕성은 가장 곤란한 문제다. 주권국가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을 갖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규제하는 법에 승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제법은 실제로는 어떤 강국의 '폭력'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은 그러한 강국의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쉽다.[……](가라타니 고진『윤리 21』, 2001, 177-178쪽)
그가 이야기한 것은 '국제법'에 대한 것이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권국가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을 갖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국제 시스템은, 2번 전제를 자동적으로 요청합니다. 그것의 의미는, 국가의 '주권'이라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절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 보댕이 16세기 후반『국가론』을 통해 역설한 '군주주권'의 절대성이 베스트 팔렌 조약에 의해 국제질서의 기초로 자리잡은 것은 1648년의 일입니다. 그 뒤 '군주주권'의 개념은 '국민주권'의 개념으로 바뀌고 세부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며 불가침하다는 원칙은 국제사회에 의해 몇 번이고 확인된 바 있습니다. 어째서 국가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미국의 정치학자 Joseph Nye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주권국가의 내정에 대해서는, 비개입이라는 게 국제법의 근본규범이다. 비개입이야말로, 질서와 정의 양쪽에 관련된 극히 강력한 규범이다. 질서는, 혼란(카오스)에 일정한 제약을 가져오는 것이다. 국제적 무정부성 - 상위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 - 은, 만일 일정한 기본원칙이 준수되면, 반드시 혼란과 같은 의미인 건 아니다. 주권과 비개입이야말로 무정부적인 세계 시스템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두 원칙인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비개입은 정의(正義)와도 관련되어 있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공동체 - 일정한 국가로서의 영역내에서 공통의 생활을 발전시키는 권리를 정당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외부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ジョセフ・ナイ『국제분쟁』, 2007, 189쪽)
이 말은, 주권의 인정과, 그에 대한 비개입이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국가의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그것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국가'라는 것을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의 기본 단위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까지도 대두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가 그 주권을 가지고 국제정치의 중요한 행위주체(actor)로서 작동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최근 저서『세계 공화국으로』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습니다.
[……]주권국가는 타국과의 관계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권'이란 일국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권국가는, 타국이 주권국가가 아니라면 지배해도 좋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그것은, 유럽 밖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주권국가는 본성적으로 팽창적인 것입니다. 주권국가의 팽창을 멈추는 것은, 다른 주권국가 뿐입니다. 혹은, 그 주권국가에 지배된 지역이 독립해서 스스로 주권국가가 되는 것의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주권국가는 필연적으로 주권국가를 불러냅니다. 이것은, 절대주의국가가 시민혁명에 의해 국민국가로 전환해도 마찬가지입니다.[……](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06쪽)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전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습니다.
[……]리얼리즘은, 이 아나키한 구조야말로, 국제관계에 있어서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하는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왜인가. 국가를 뛰어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는 자국의 안전을 자력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즉,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조(自助) 또는 자력구제라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각 국가는, 스스로 군비증강을 꾀하거나,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거나 함으로써, 자국의 생존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국가는, 뭔가의 수단으로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자국의 정치적인 독립성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추구는 그 자체가 아무리 방위적이어도, 타국에게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다. 그 때문에 타국도,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켜려 해서, 스스로 군비를 증강하거나, 우호국과 군사동맹을 맺으려 한다. 그 결과, 쌍방의 국가 관계는 한층 적대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즉,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보하려고 해서 힘을 추구하면, 그것이 타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되고, 타국도 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하츠에 의해 지적된, "안전보장의 딜레마"라고 불리는 상황이다.[……](山田高敬・大矢根聡『글로벌 사회의 국제관계론』,2006, 28-29쪽)
이러한 'Balance of Power' 방침에 의한 무정부적 국제질서는, "그것이 '주권', 즉 '독립'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바에야, 전쟁이나 민족 자결의 침해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이러한 국제질서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Balance of Power'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세계는 '집단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을 구상하게 됩니다.
[……]1918년 1월, 미국은 참전 이유로써 14개조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 14번째가 가장 중요했다. 그것은 "대국(大國), 소국(小國)을 묻지 않고,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상호적 보장을 서로 부여하는 일을 목적으로, 명확히 규정된 협약아래, 제(諸) 국가의 전체적인 연합조직이 결성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윌슨은 국제시스템을, 밸런스 오브 파워에 기반한 것에 집단안전보장에 기반한 것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다.[……](ジョセフ・ナイ『국제분쟁』, 2007, 108쪽)
이 '집단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은, 이전까지는 국제정치상 실현되지 않았던 개념으로, '무정부적 질서' 속에서 따로 따로 행해지던 '개별 국가의 자조적(自助的) 안전보장'을 집단의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침략국이 강대한 힘을 갖고 있다면, 개개의 국가는 당해낼 수 없지요. 그러나 비침략 국가가 침략자에 맞서 결속한다면, 힘은 비침략 국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제 안전보장은 집단의 책임이 되고, 이전처럼 '중립'이나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대로, 이 '국제연맹'은 자기의 목적을 다하지 못합니다.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이상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세계는, 제 2차 대전이라는, 역사상 없었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45년 창설된 국제연합의 헌장 전문(前文)이 가장 처음 들고 있는 이념은, "우리들의 일생 동안, 두 번 다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를 인류에게 안겨준 전쟁의 참해로부터, 장래의 세대를 구한다"는 결의입니다. 이후는 미·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와, 냉전 종결 이후의 세계가 놓여지게 되지요. 여기까지가 제가 간략하게 살펴본 국제정치의 역사입니다.
제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상의 논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저는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라는 학문 안에서 positivist의 관점에 서 있는 것일테고, 이 관점을 부정한다면 post-positivist의 관점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제가 positivist의 관점이라고 해서 국가를 신봉하고 있는 건 아니고, post-positivist라고 해서 국가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닐 터입니다.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지X 씨가 이야기한 "국가(nation-state)의 사고틀"을 벗어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서술한 몇 가지 전제들 -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anarchy하다, 국가의 주권은 다른 나라에 의해 지탱된다 등등 - 을 완전히 거부하신다면, 토론을 할 이유는 아마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X 씨는, 저의 전제들을 전부 부정하시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계시민'이라는 논리를 이끌고 가는 축은 '국가'라는 사고체계이죠]라고 하신 걸 떠올린다면 말이죠. 일단 그렇다고 가정을 하고, 저의 논의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X 씨가 제기한 문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국민국가와 시민권이라는 틀이 무엇을 기반으로 지탱되는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 현재의 UN 중심의 '국제질서'나 '안전보장' 자체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인권·인도주의의 애매모호함을 고려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건 제가 멋대로 '추출'해서 '정리'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놓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런 것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번은 제가 제시한 국제정치의 관점에 따르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국민국가'는 어디까지나 타국에 대해서 '국민국가'이며, 그 영역 내에서 시민권은 자리하게 됩니다. 이건 '이론'이나 '이상'의 영역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국가'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지X 씨는 페이퍼에서 이렇게 얘기하셨지요. [The identification of ‘us’ through constructing an image of the enemy shares its dynamics with the corroboration of nation-state and sovereign space through an arrangement of wars.] 정확히 그렇습니다. '국민국가'와 '시민권'은 그런 식으로 구성됩니다. 현대의 '국가'라는 개념은 분명 (냉전을 포함한) 전쟁에 의해, '적'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성된 것입니다. 이걸 재검토하자는 말은, 과연 무얼 어떻게 하자는 의미일까요.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 뿐일까요. 우리는 '국민국가'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다른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 자신을 성립시켜 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런 문제들을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대현의 용법을 빌리자면) 이 점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걸까요. 저는 고진의 지적대로,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만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결코 '인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입니다.
2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냉전의 종결 이후, 국제질서의 핵심 축이라고 생각되는 UN에 대한 비판은 많아졌습니다. 지X 씨 역시 UN 체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요. 저는 이에 대해서, UN 체제 이외의 다른 대안을 제시하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UN체제의 문제점 역시,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알려져 왔습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문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한 지배의 문제, 냉전의 종결 이후 증가한 새로운 형태의 분쟁(민족분쟁, 종교분쟁 등)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 등등. 이 문제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앞에서 얘기했듯이, 국제연합이 결성된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집단안전보장'에 있습니다. 지X 씨는 이런 '안전보장'의 개념이 낡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집단안전보장'은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한 가장 유효하게 기능할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수단입니다. 만일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려면, 우리는 UN 체제의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수정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봅니다.
UN 체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냉전 체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사정을 고려하는 편이 공정할 것입니다. UN 창설 이후 지금까지, UN이 행한 평화유지활동은 총 65건인데, 냉전시기(45년 이후~80년대 중반까지)에 시작된 활동은 단 12건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53건은, 모두 냉전의 종결 이후에 시작된 활동들입니다. UN의 하이레벨 위원회 보고(웁살라 대학 평화·분쟁학부와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명확히 냉전 이후(86-88년)부터 내전에 대한 UN의 평화유지·평화구축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됩니다.(明石康,『국제연합』, 2006, 124쪽) 연간 평균 9천만명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 역시, 그 본격적인 활동은 냉전이 와해되던 1980년대부터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UN 체제에 대한 비판은 조금 치우쳐 있는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강대국의 playground'라는 비판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익히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UN 체제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분명 현대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이상, 그에 대한 대안이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X 씨가 페이퍼에서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인권'의 문제 역시, 그것을 재검토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X 씨는 페이퍼에서, Jennifer Hyndman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Jennifer Hyndman argues that one should distinguish human rights, human security and humanitarian intervention, claming against what she calls ‘UN humanism.’ Human security is distinguished from human rights in that the former is established not as a law meaning it is exposed to being applied selectively as shown in the case of Rwandan genocide, while the latter is elucidated in United Nations documents. Hyndman points out that ambiguities of human security lead to its operation as “imperial benevolence,” and as a common adaptation of human rights. Humanitarian law is also out-dated, considering that it was drafted right after the Second World War by a formulation of liberal states and that most recent wars are not waged between countries. Basically, a lack of clarity in the term ‘humanitarian’ raises different questions on how, when and, whether foreign intervention could be applied since “while states remain major actors and members of the UN, the balance between the legitimate power of states and individual human rights appears to be shifting.”[……]
Hyndman이 이야기하는 문제점, 즉 human rights와 human security의 구분은, 바로 그녀가 이야기하는 'UN Humanism'의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입니다. human security 문제가, UNDP의 1994년 인간개발보고서에 의해 국제사회에 제기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주도에 의해 "인간의 안전보장(human security)에 관한 국제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인간의 안전보장 기금" 역시 마련되었습니다.(東海大学平和戦略国際研究所 編『21세기의 인간의 안전보장』,2005, 123-148쪽) Hyndman이 지적한 문제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바가 있는 것이고, 앞으로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아갈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참고로, 이 문제도 심포지움에서 거론된 바 있습니다. 제가 글에 쓰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UN Humanism'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것이 지니는 의미 -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무엇을 상정함으로써 생기는 의미 - 를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아래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야기입니다.
[……]'보편적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커녕,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정치행위자가 (특정한 정체성의 담지자인) 자신과 근원적 불일치를 주장할 권리, 스스로를 사회 구조물에서 어떠한 고유한 자리도 갖지 않은 '열외자'(supernumerary)라고, 그래서 사회 자체의 보편성의 주체(agent)라고 상정할 권리다. 따라서 이 역설은 매우 엄밀한 것으로, 보편적 인권이 비인간적인 상태로 환원된 사람들의 권리가 되는 역설과 대칭을 이룬다.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창작과 비평』2006년 여름호, 379-404쪽)
지젝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결국 '보편적인 인권'을 그냥 비판하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순간, 우리는 들고 싸울 무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앞에서 지적한 점들도, 그리고 앞으로 지적할 부분도 바로 그런 인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쓴 것은, 지X 씨의 의견을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의문' 이외에 다른 걸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셔널리즘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무엇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안을 찾는 것이, 지X 씨가 지적한 국제질서 속의 '외교'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방안으로서,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하는 비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또 그게 가장 가까운 미래에 달성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세계 공화국으로』에서 칸트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국가에게 있어서, 다만 전쟁 밖에 없는 무법의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서는 다음 방책밖에 없다. 즉, 국가도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의)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무엇보다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제민족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해서, 이 국가가 결국에는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게 한다, 라는 방책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국제법의 사고에 따라서, 이 방책을 취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고, 그런 까닭으로 일반명제로서 in thesi 올바른 것을 구체적인 적용면에서는 in hypothesi 물리치므로, 하나의 세계공화국이라는 적극적 이념 대신에(만일 모든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전쟁을 방지하고, 지속하면서 항상 확대하는 연합이라는 소극적인 대체물만이, 법을 혐오하는 호전적인 경향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항구적 평화를 위하여』,宇都宮芳明 역)[……](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22쪽)
이 칸트의 이념을 바탕으로,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구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국가에 대항하면 좋을까요. 그 내부로부터 부정해 나가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지양(揚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 양도하도록 만들고, 그것에 의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헌법 제 9조에서 전쟁포기란, 군사적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렇게 주권의 포기(放棄)가 행해지는 이외에, 제(諸)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25쪽)
국제질서에 대한 저의 견해와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을 결합했을 때, 저는 이런 고진의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며 또한 효율적인 것이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X 씨가 ['동북아시아'든 '유럽연합'이든 미국을 견제하고 '자국'을 보호한다는 식의 외교는 결국 '힘'을 갖게 되면 '미국'이 하던 똑같은 짓을 또 다른 국가들에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그다지 찬성하지 않습니다. 각국이 연합체를 구성하고, 그로인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결국 지X 씨가 말하는 "냉전체제 때 그려진 틀"이라는 것을 벗어나는 유효한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최장집 교수의 글입니다.
[……]동아시아에서의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탈냉전, 세계화와 더불어 현저하게 변했다 하더라도 한반도가 분쟁의 진앙지가 되는 한 이 대립의 구조는 다른 형태로 재생될 수밖에 없는 위험을 갖는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이 지역을 지칭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냉전시기 동아시아라는 말은 이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이 지역의 공동관심사와 이해관계, 공동의 목표, 그리고 공동의 이상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 말은 냉전시기의 대립구조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다는 의미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즉 그것은 이 지역을 분할했던 냉전시기의 대립구조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곧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지역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동아시아라는 말은 두 가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냉전으로 분할된 지역임을 부정하고, 어떤 것을 공유하는 지역이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패권국가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그 필요에 따라 외부로부터 부여한 명칭이 아니라, 이 지역 국가들 스스로가 갖는 내적 요구와 필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범주를 호명해냄으로써 우리는 무엇에 대항하는 안보가 아니라 스스로의 평화를 만들기 위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최장집「동아시아 공동체의 이념적 기초 - 공존과 평화를 위한 공동의 의미지평」,『아세아연구 통권 118호』,2004, 98-99쪽)
이 정도로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무엇에 속고 있었냐를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인 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하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칸트의 말도, 아마 그런 맥락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포스트'가 붙은 모든 이론과 개념들이 가져다 준 '의심'과 '재검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현실을 바꿀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 이건 사족이지만, 지X 씨는 제 답글이 꽤나 날선 것처럼 느끼셨나 봅니다. 확실히 저는, 이전의 답글에 비해 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지X 씨의 답글이 '불성실'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말을 좀 빌리자면, 저는 이상주의적이든 교조주의적이든, 그 어떤 주장이든지간에 성실하기만 하다면 저 역시 성실하게 답글을 달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성실한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성실하게 답변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타인의 오해나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참을성이 없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글을 쓰는 대부분의 경우는, 제가 그 사람의 주장이 불성실하다고 판단했을 때입니다. 그 이외에는, 그리 지나칠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기억이 없군요. 이건 아마 성격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전에 지X 씨가 했던 말대로, 공부를 "하는 방법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님 공부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고 있던가."
* 인용의 출전 중, 한자나 일본어로 저자의 이름이 적힌 저작들은 모두 일본어 서적입니다. 제가 번역해서 썼기 때문에, 오역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