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달 10일 고려대 일본학 연구센터와 일본문화원이 주최한 심포지엄 ‘문학의 새 지평-기억·경계·미디어'가 열렸었다. 참가자는 시마다 마사히코, 신경숙, 기리노 나쓰오, 구효서 씨. 이걸 꼭 가고 싶었는데, 당시 아르바이트 중이고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포기했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강연 녹음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시마다 마사히코 씨의 강연을 듣고서 내용이 들을만한 것 같아 녹취하여 번역해 보았다. 몇몇 부분은 동생이 도움을 주었으며, 끝끝내 녹취가 어려운 부분은 일단 괄호로 표시해 두었다. 몇 부분 안되긴 하지만 나중에 지속적으로 확인해 볼 예정이다.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의 강연은 총 40분 가량의 분량으로, 마지막 6-7분에는 직접 쓴 시를 발표했다. 시는 녹취상 행갈이라든가 연의 구분이 어려운 문제로, 강연 자체의 내용만을 번역했다.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 시베리아의 오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이라든가, 사막에 살고 있는 유목민, 그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도록 말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계를 이곳저곳 여행해 온 것도, 다른 나라 말의 힘, 이것을 자신의 언어에 포함시키고 싶다,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궁극의 자유란 것을 추구하면 인간은 결국 야만이 됩니다. 자유의 추구에 본성을 발휘하는 작가가 야만이 되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증오, 이것은 강렬한 집필의 엔진이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희박하게 만들려는 세계에 대해서는, 나의 존재를 저주의 말과 함께 깊이 새겨 넣는 것이야말로 복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립무원이라는 것은 작가의 훈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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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제부터 네 분, 한국 일본, 일본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작가 네 분의 진솔한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발표순서는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 신경숙 선생님, 기리노 나쓰오 선생님, 구효서 선생님, 네 분이 연달아서 발표를 하시겠습니다. 발표시간은 30분입니다. 다른 학술 심포지엄의 사회와 달리 사회자가 요약을 하거나 하는 건 일절 하지 않겠습니다. 요약 자체도 여러분이 들으면 아시겠지만 또 하나의 권력이고 강요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유롭게 상상을 하고 기억을 하는 그런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네 분의 약력을 소개하는 것으로 해서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의 소개를 하겠습니다.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은 1961년도에 동경에서 출생을 하셨고, 1983년도에 동경 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 재학 중에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優しいサヨクのための嬉遊曲으로 데뷰를 해서 신세대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 해, 아쿠다가와상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이 되고, 그 이후에, 1984년도에 몽유 왕국을 위한 음악夢遊王国のための音楽, 1985년에 나는 모조인간僕は模造人間, 1986년도에 돈나안나, 1987년도에 미확인 미행물체未確認尾行物体, 합계 연달아서 6번 아쿠다가와상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되어, 최다 낙선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을 평가하는 분들은 이렇게 훌륭한 분이 왜 수상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면서 심사 선고 과정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은 1984년도 몽유 왕국을 위한 음악으로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하셨고, 1992년도에 나츠메 소세키의 고코로를 패러디한 것으로 알려진 피안선생彼岸先生 으로 이즈미 교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2000년부터는 미시마 유키오 상 선고 위원으로 활약하고 계시고, 그 외 한국어로 번역된 많은 책도, 작품도 있습니다. 정해성 씨가 역한 꿈의 메신저夢使い, 양억관 씨가 번역한 나는 모조인간僕は模造人間, 그 외 또 수많은 작품들이 있으며 희곡 혹은 쥬니아 버터플라이, 같은 오페라 대본도 있습니다. 특히 올해 2006년도에는 退廃姉妹, 퇴폐자매로서 이토오 세이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크게 활약하고 계시는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의 강연 발표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로) 그럼, 시마다 마사히코 선생님, 강연 부탁드립니다.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저는 시마다 마사히코입니다. (이후 일본어) 오늘은 제가 맡게 된 30분을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직 한국의 독자분들 중에는 제가 시를 쓴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되어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시인으로서 낭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그 시를 읽기에 앞서, 서곡으로서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만년 정도 전에 언어능력을 획득했습니다. 언어능력이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유럽의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근처에, 피레네 산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곳의 동굴에는 유명한 벽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라스코라든가 알타미라라는 동굴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그려진 동물의 그림, 예를 들어 소 그림이나 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만, 그 소나 말, 이것은 현대인인 우리들이 보아도 굉장한 작품으로, 분명히 2만년, 그려지고 나서 2만년 정도 지났음에도 소라고 확실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그림에 그려진 소는 안타깝게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썩는 일도 없습니다. 죽는 일도 없지요. 말하자면 자연계에 존재하는 소라는 것은,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없어집니다. 죽어버립니다. 소멸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소 그림이라는 것은 벌써 2만년도 넘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소, 이것은 뒤에 예술이라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뇌에 들어온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진짜 소에 대응하는 소의 그림, 에 해당하겠지요. 여러분도 옛날, 지금도 조금입니다만, 한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 한자라는 것은 상형문자로, 원래의 모습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림이죠. 예를 들어, ‘女’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女’라는 글자는 여성이 얌전히 무릎을 꿇고, 이런 식으로(모습을 흉내낸다), 이것을 본뜬 그림이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문자와 그림이라는 것은 본래 같은 곳에서 나온 것이지요. 요컨대 그 그림으로부터 문자는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언어능력을 가진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는,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도 들어있는 화폐가 있습니다. 원래 화폐라는 것은,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금속의 화폐라든가, 조개껍데기라든가, 소금이라든가, 여러 가지 것이 화폐가 되었습니다만, 현재는 종이에 잉크로 사람 얼굴이라든가 숫자가 찍힌 인쇄물, 이것을 화폐로 쓰고 있는 셈으로, 기본적으로는 책 쪼가리 같은 것을 화폐로서 사용하고 있지요. 이것이 뒤에 물물교환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능력이 낳은 것 중에는, 법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생활을, 또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룰을 정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언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언어능력을 활용한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무래도 구애, 또는 연애라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후세에 자손을 남긴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전에 구애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여기에 계신 미남미녀 분들 한 사람 한 사람도, 최소한 한 쌍의 남녀가 없으면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 구애활동이라는 것은 매우 다종다양한 것으로, 그 구애활동 자체가 문화의 양상을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전에 동물의 경우를 살펴보면, 예를 들어, 공작. 공작이라는 것은 매우 훌륭한 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수컷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진화한 것입니다. 공작의 세계에서는 화려한 수컷일수록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공작들은 그저 오로지 공작의 꼬리를 화려하게 하기 위해 진화해 온 것입니다. 또는, 북쪽 바다에는 말이죠, 이런 긴 엄니를 가진 바다코끼리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 엄니도 사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만 진화한 것입니다. 또한, 울음소리가 매우 화려한 나이팅게일이라는 새가 있습니다만, 이 울음소리의 화려함이라는 것도 오로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진화해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의 동물이 갖고 있는 구애의 방법, 이것이 인간의 경우에는 언어능력으로 발휘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학자라는 것은, 시인이든 극작가든 소설가가 되었든 그렇지만, 자신에게 갖춰진 언어능력을 충분히 활용해서, 그것을 구애 활동으로 바꾸어왔다고 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고결함. 윤리지요. 그것을 포함해서 덕의 높음, 이것을 가지고 암컷을 유혹하려고도 해왔고, 부자는 자신의 부를 이용해서 구애해 왔다는 것입니다. 일본문학의 경우도, 역시 이 언어활동을 가지고 행한 가장 중요한 활동인 구애활동, 이것에 바쳐져 온 점이 있어서, 인간만이 아니라 어느 동물도,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을까라는 것을 생각하는 데에 자신의 지성 대부분을 사용해 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경제활동도 연애도, 정치도 물건 만들기도, 인간의 활동 거의 전부는 언어활동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저도 보통은 일본어 기준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 시베리아의 오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이라든가, 사막에 살고 있는 유목민, 그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도록 말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세계를 이곳저곳 여행해 온 것도, 다른 나라 말의 힘, 이것을 자신의 언어에 포함시키고 싶다, 이것이 이유였습니다. 만일, 저에게 기회가 생겨 우주여행에 나간다면 - 그 경험을 시로 쓰는 일이 가능하다면야 반드시 참가하고 싶지만 - 당장 우주여행에는 꽤 돈이 들기 때문에, 우주선에 오르는 멤버에 뽑히는 것부터가 절망적이지요. (웃음)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 체재하기 위해서는 25억 엔 정도 필요하니까, 공짜로 타려고 생각하면, 시인, 또는 소설가라고 하면 괜찮겠지요. (웃음) 좀 더 우선순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면, 그걸 위해서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저는 요리가 특기입니다. (웃음) 요리사라는 건 옆에 있으면 편리, 하다는 점도 있지요.
그런데, 시라든가 소설을 쓴다는 작업, 이것은, 개인의 창작이라는 것은, 언어의 실험장 같은 곳입니다. 언어라는 것은 이곳의 경험이나 생활에 매우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와 함께 변해갑니다. 그것에 비해 법률이라든가, 도덕 같은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말을 ()하려는 것은, 항상 언어, 또는 교육이라든가 정치에 의해, 아니면 미디어에 의해, 무의미해진 언어에 새 생명을 주는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언어는 온갖 세계로부터 솟아오르죠. 그야말로, 고아의 한탄 속에서 솟아오르는 말, 유흥가를 방황하고 있는 가출소녀의 일상에서 솟아오르는 말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살아남은 말은 아닙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국지적인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말로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한층 불변하는, 불변성을 가진 언어로 개량하려는 것, 그것이 문학자뿐만 아니라 학문을 하는 자 모두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뇌과학자인 친구가 있어서,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그 친구로부터 들은 것입니다만, 뇌과학의 세계에는 미러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 활동하는 신경, 뉴런이 다른 사람이 그 행동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마치 거울에 비춘 것처럼 똑같이 반응한다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시큼한 레몬, 또는 우메보시, 이것을 다른 사람이 핥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기 자신도 시큼한 맛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우메보시를 핥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시큼하다고 느끼는 신경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거지요. 자신의 행동이든 타인의 행동이든, 어떤 행동에 관계된 정보처리 방법을 사람이 공유하고 있다는, 그것을 가지고 공유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타인의 행동도 자신의 뇌 속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얻어맞는 것이 자신이 아닌데도, 자신이 보고 있는 곳에서 누군가가 지금 막 얻어맞으려고 하면, 그때 역시 얻어맞으려 하는 것을 보고 있는 타인인 자기 자신도 아파, 라고 하는. 이렇게 되는 식으로, 타인의 기분을 알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인 이상은 마음이나 몸으로 느끼는 고통, 쾌락, 이것은 정도까지 같은 것으로, 만일 매우 멋진 남자를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 아니어도, 타인이어도, 충분히 실제로 사랑에 빠져 있는 그 여성의 동요나 설렘은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일처럼. 그래서 연애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것이 간신히 성립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메보시를 핥은 책임, 사랑을 하는 책임이라는 것은 당사자가 지는 것이 당연하고, 이것은 타인이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는 그 행동의 책임의 문제라는 것은, 역시 당사자가 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행동의 ()의 귀속 문제가 ()면,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과 착각하는 일이 되어 버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살짝 속삭여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는, 당신의 연인이 아닙니다. (웃음)
하지만,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비해, 인간은 꿈을 꾼다는 독특한 해결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타인이 된 것처럼 할 수도 있고, 현실을 뛰어넘는 일도 자유롭습니다. 꿈은 지금 시점에서 아직 산업이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가 적어져버리니까요. 그러나 꿈속에서 태어나서 그 뒤 현실이 된 과학상의 발견이나 문학의 걸작 같은 것도 그 중에는 있지요.
그런데, 타인에 대한 공포, 이것은 자연에 대한 공포와 닮아 있습니다. 사람은 타인과 자연을 컨트롤하고 싶다,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농업, 이것은 자연을 인공화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날씨의 영향을 받아서 흉작이 되거나 풍작이 되거나 한다는 의미에서는 동시에 자연이기도 합니다. 타인이라는 자연을 가공하고, 추상화해서 관리하려 하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입니다. 그러나, 타인은 자신의 상식이나 생각이 통하지 않거나 때때로 자신을 배반하는 자연입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눈에는 나도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역시 자연의 일부이지요. 확실히 인간이라는 자연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려고 한 결과 태어난 것이 컴퓨터입니다. 컴퓨터 개발의 원조로도 생각되는 튜링이라는 사람은, 인공지능의 개발에 대해서 가면을 통해 대화했을 때 상대가 컴퓨터인지 인간인지 구별이 되지 않으면 컴퓨터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고 정의했습니다. 또, 기계를 정의할 때 통상의 방법으로 태어난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장래에 복제인간이 태어날 것을 내다보고, 그것은 기계가 아니라고, 기계의 정의 밖에 두었습니다.
물론 튜링이라는 남자는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로서 컴퓨터를 발명하려고 한 것입니다만, 실은 그 발명의 동기 중에 그가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고민했다, 동성애자였다는 점이 들어갑니다. 예전에 동성애라는 것은, 범죄나 병의 일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 자신도 말이죠, 그 동성애가 병, 범죄의 일종이었던 시대에는, 과연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과학자인가, 범죄자인가, 건전한가 병들었는가 고민했습니다. 그 한 남자의 내면이 컴퓨터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컴퓨터 세계도 - 저는 컴퓨터에 매우 어두운 사람입니다만 - 개발의 계기로 그런 일로 고민한, 자신의 정체성 위기로 고민한 과학자의 내면이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갑자기 친근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의 IC, 집적회로임과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연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문학은 틀림없는 실용적 학문입니다. 이공계의 학부로 문학부와 같은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은, 물리학과 화학이 그렇습니다만, 예를 들어 뉴트리노의 관측에서 볼 수 있듯이 거대한 실험 장치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기초과학, 이것은 곧바로 돈벌이로 연결되는 실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적탐구심이라는 것이 항상 지향하는 것은, 그러한 실용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쾌락이 아닐까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해 보고 싶다든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보고 싶다든가, 그런 불합리한 욕구가 이 지(知), 또는 과학이라는 것을 떠받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일을 그 실용성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그 가치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 운석이 지구에 충돌했습니다. 그 때문에 공룡은 멸종했습니다만 그 시점에서 운석의 충돌은 공룡에게 있어 매우 괴로운 일었고 최악이었겠지요.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보면, 그 일로 인해 포유류가 번영하게 되었고 오늘의 우리들도 있게 되었다는 것으로. 그 시점에서, 무엇이 쓸모가 있고 무엇이 쓸모없는지는 당장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글쓰기. 저로서도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이를 먹어도 자유롭게 사물을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야만으로 있을 수 있을 것, 또는 어리석어질 수 있을 것, 입니다. 궁극의 자유란 것을 추구하면 인간은 결국 야만이 됩니다. 자유의 추구에 본성을 발휘하는 작가가 야만이 되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영웅과 무뢰한의 시대가 끝나고, 대신 흔해빠진 시민이 거꾸로 왕좌에 오른다. 그것이 근대문학입니다. 그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서는, 고대 그리스 영웅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비즈니스맨의 하루의 기록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 근대문학의 문 앞을 서성여 온 것은, 불필요한 자들과 특성 없는 남자들이었습니다. 작가는 ()로는 가장 ()로, 사회적으로는 폐를 끼치는, 분류상으로는 범죄자나 비국민이나 변태의 무리입니다. 작가는 언어를 다해 그것들에 대해 의견을 보이고, 또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때로는 연금술사, 위폐제조자로도 비유되어 왔습니다. 모두 잊어버려 돌아보지 않는 과거에 연연하거나, 일부러 저 세상에서 죽은 자를 불러낸다거나, 사회에서 미움 받는 자들을 옹호한다거나,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거나, 사적인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하는 일에, 가지고 있는 정열과 기술 전부를 쏟아 넣는다. 그런 것에 의해 문학자는 수명의 연장을 꾀해 온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증오, 이것은 강렬한 집필의 엔진이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희박하게 만들려는 세계에 대해서는, 나의 존재를 저주의 말과 함께 깊이 새겨 넣는 것이야말로 복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립무원이라는 것은 작가의 훈장입니다. 때때로 인기 있는 자는 영합이라는 쓸데없는 일을 처리하는 동안 평범해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증오를 유지할 수 있는가, 그것이 승패의 갈림길이 되겠죠. 형기가 있어 결국은 출소할 수 있는 죄수와 사형수를 비교하면, 사형수 쪽이 창조적인 것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찮은 희망이라는 놈이 의외로 인간을 평범한 사고로 이끌어버립니다. 사형수처럼 절망 속까지 떨어지면, 자신의 의식 속에 자유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으므로, 이 상태에서는 선택의 여지없이 창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