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기다, 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기 시작한지 몇년이나 되었다. 90년대의 후일담 문학과 여류작가(이 말도 낡은 게 되었지만)들의 소설이 우리 문학계를 지탱한 뒤로, 우리의 문학은 긴 침체기에 빠져있다, 고들 한다.
  이런 침울한 분위기에 파장을 더하는 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쓴 책『근대문학의 종언』이다. 물론 문학에 별 관심없는 사람들에게야 그게 파장을 더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이 책의 핵심이 되는 논문이 계간지『문학동네』에 소개된 게 2004년 겨울인데, 벌써 2년 넘게 우리 문학계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내 억측이 아니라 사실이다. 문학평론가 황종연 씨(가라타니 고진도 제자로 인정했다는)도 2006년 8월호『현대문학』에 고진의 책을 읽은 뒤에 쓴 평론을 실었다. 그가 우리 학계에 미친 영향력은 90년대 이후로 줄곧 강력해져 왔지만, 특히 요즘의 어두운 문학계(라고 불리우는 것)에는 더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의 발언이 우리나라에 특히 영향을 주는 이유는, 그가 탐구하고 예측한 현대 문학의 속성과 전망이 현재 우리나라 문학(이라 불리우는 것)의 어두운 미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 자신이 일본에서 문학비평을 해온 경험으로 말하지만, 근대문학은 1980년대에 끝났다는 실감이 있습니다.[……]아메리카에서는 그것이 한층 빨랐습니다. 그 증거로 최근 일본의 대학에서는 ‘창작과’가 증가하고 작가들이 그곳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는 이런 현상이 1950년대부터 진행되었습니다. 포크너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사창가를 경영해 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건 고사하고 현실적으로는 작가가 대학의 창작 코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아메리카에서 문학부는 전혀 인기가 없습니다. 영화를 함께 하지 않으면 꾸려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일본에서도 문학부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가 책에서 쓴 내용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근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문학은 이제 그 힘을 잃었고, 자신은 거기에 더 이상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대항해야 하고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은 아직도 잔뜩 쌓여 있지만, 문학이 근대에서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믿음은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의 책이 나온 뒤로, 아니 그의 논문이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뒤로, 많은 말들이 나왔고 또 아직도 많은 논쟁을 생산해내고 있다. 앞에서 말한 황종연 씨가 고진의 논리에 대해 '변증법적 합'을 구하려 하고 있다면, 젊은 평론가 고봉준 씨는 고진의 논리에 찬성하면서 한국 문학의 가벼움을 질타한다. 서로 말한다. 문학은 죽었다,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다, 살려야 한다, 아니다, 이 기회에 아주 체질을 바꿔야 한다, 무슨 소리냐 죽은 적도 없는 문학을, 너야말로 무슨 소리, 시체를 붙잡고 애무하지 말아라 등등등. 말들이 난무하고 또 난무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논쟁들은 모두(이런 논법은 싫어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일부러 잘못된 부분을 짚고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같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진의 책 자체가 '아아, 이제는 끝장이다' 식의 종말론적인 어조를 띠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는 근대문학 이후 예를 들어 포스트모던 문학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또 문학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이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리 높여 말하고 다닐 사항은 아닙니다. 단적인 사실입니다. 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이젠 적습니다. 때문에 굳이 내가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문학이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졌던 시대가 예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뭐 이런 수준의 이야기다. 근대의 문학이 '엑기스'로 지니고 있던 그 무엇이 사라졌다는 얘긴데, 한국은 이 말에 과민반응한다. 그 이유는 아마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엑기스'라는 것(즉 자본과 네이션에 저항하는 '근대적 자기', 그리고 이를 대변하는 근대의 문학정신)의 영향력이 아직 우리나라에는 일본에 비해 많이 남아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과민하게' 반응해야 할 사람들만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
  첫번째 이야기는 다들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이전까지 극렬한 '근대 이전-근대'의 기묘한 시대 속에서 살았다. 따라서 문학도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기에 바빴다. 고진의 말대로, "실제 한국에서 문학은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이다. 그 시대의 문학이 가져야 했던 것은 자본과 네이션에 대한 강한 반작용이었다. 네이션의 구속, 그리고 어느 시대보다 근대적인 - 특히 근대 억압의 핵심만 모아놓은 듯한 - 시대상황에 대해 말해야 했고, 또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와 전후의 상처를 문학이 대변하는 전통(그 많은 대하역사소설들)이, 그런 근대적인 문학정신이 7, 80년대의 '근대문학'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반면 일본은 그런 '근대적인 문학'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다. 이미 1970년대 말, 류나 하루키를 가장 큰 축으로 해서 근대적인 문학과는 거리가 먼 그런 문학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그 시작은 여성작가들의 개인적 소설에서 조금씩,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김영하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나라의 문학은 '근대적인 문학'과 '비-근대적인 문학'(근대적인 문학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중간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일본처럼 (근대)'문학의 종언'을 누군가가 선언할 처지도, 그리고 그 선언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상황도 못 된다.
  두번째가 중요한데 -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긴데, 사실 작가들 중 어느 누구도 '문학의 종언'이라는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언한 예가 없다. 물론 어떤 지면에서 발표된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평론가들은 신문 칼럼 쪼가리를 비롯해서 계간지의 두툼한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과 자세로 발언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는 결국, 작가들은 이것을 소리높여 말해야 할 하나의 심각한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진의 의견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니다, 지금도 문학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말하는 이가 고립을 각오하고 해나가고 있는 소수의 작가라면 좋습니다. 실제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써왔으며, 이후로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은 건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 존재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에 불과한 무리들이 그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문화적인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창작하는 사람들보다는 그걸 하나의 '생산-소비' 체계로, 산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추세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평론가들은 구구절절 말하기 바쁘지만, 작가들은 그럴 겨를이 없다. 그들은 쓰기 바쁜 것이다. 물론 평론가들은 그게 직업이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이 한국의 문학계를 이끌어갈 싹을 발굴하기에 바빴는지 아니면 옆나라 논문으로 시끄러워진 참에 말 한마디 하기 바빴는지를 생각해보면 별로 정도 안 간다. 이러니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질 하는 사람들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한 사람은 박민규이리라.

[……]문단인지 평단인지, 아니 세상이여! 우선 말하겠는데 제발 좀 문학의 위기, 소설의 위기라고 떠들지 마라. 호들갑 좀, 떨지 말아라. 나는 어디 핵이라도 떨어진 줄 알았다. 쉰 소리 하려면 집에서 쉬어라, 나오지 마라. 그것이 문학을, 또 우리를 도와주는 길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가 아니다. 문학의 위기를 떠드는 놈들의, 위기일 따름이다. 아이고 귀야. 귀에 슨 녹슨 못을 뽑아내며, 나는 중얼거린다. 너무 그러니까 니들이 마치 '문학' 같잖아? 니들이 '문학'이냐?[……]

*   *   *

  얼마 전에 서태지의 'ETP fest 2002'의 리레코딩 테잎을 다시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노래 '울트라맨이야'는 6집 앨범으로 처음 들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 노래에서 핵심적인 가사는 "솔직한 해답을 갖자 / 영웅이란 존잰 더는 없어 / 이미 죽은지 오래 / 무척 오래 / 저 태양 아래 / 바로 이날의 영웅은 바로 너야"라는 부분이다. 앨범으로 들을 때는 그냥 밋밋했는데,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것 같은 공연의 분위기는 정말로 자신들의 팬에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일종의 감동까지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내가 서태지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 온 세대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무렵에 데뷔하여, 내가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시기에 은퇴하고 다시 화려하게 솔로로 섰다.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 가장 영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팬덤이 아니었다. 그가 영웅이 된 것은 스스로 동시대의 모든 편견과 족쇄를 부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데뷔하여 미디어의 지배구조를 바꾸고, 뮤지션의 재충전을 가능하게 만들고, 사전검열을 철폐시키고(그의 힘이 컸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음악시장을 질적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런 그가 말한다. "바로 이날의 영웅은 바로 너"라고. 그리고 박민규 역시 말한다.

[……]요는 무엇인가? 나는 당룡이고, 그냥 날 내버려두란 얘기다. 어떤 면(面)에서 세상은 분명히 달라졌다. 네가 당룡이냐? 끄덕끄덕. 삼가 한수를 배우겠소. 오호라 학익(鶴翼)의 품세를, 그렇다면 용호(龍虎)의 권세로! 쿵후라는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좋은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다. 문학이라는 이름만으로, 또 소설이란 이름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죽이던 시절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었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과거의 문학을 동경해 작가가 된 인간이다. 눈물이 날만큼, 그때가 그립다. 누군들, 품세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지 않으랴.[……]

  그런 시대가 있었다. 서태지의 이름만으로 열광하던 시대가. 그리고 문학이나 소설이 그런 '영웅'(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근대의 문학정신 같은)이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고, 이제 더 이상 영웅은 없다. 이미 죽은지 오래다. 무척 오래란다. "세상은 나의 문파와 나의 품세 따위에 관심을 접은 지 오래"다. 고진이 자라던 시절에 무시무시하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문학은, 그 '영웅'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가 '당룡'이 되어야 한다. 이 날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영웅이 되어서, "실제로 충격을 주고, 파괴하고, 저것을 쓰러트려야 한다." 그들의 시대는 아름다웠다. 이제는 우리가, 이 시대를 아름답게 만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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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연 2006/11/02 03:35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앗. 새 글이다.
    못 본 사이에, 문장들이 영글었어.
    음, 하지만 여전히 힘이 들어간 느낌이네.
    아무튼, 새 글 반갑다.

    아, 그리고
    몸은 전반적으로 괜찮아졌어.
    여전히 뒷목은 시큼하지만.

  2. 우람 2006/11/04 01:04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기다린 보람이 있는데요!

  3. 바람君 2006/11/04 19:49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시간을 들여 찬찬히 읽어보았다.
    글이 올라왔다는 사실은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맘편히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읽을 여유가 없었어.
    문학에 대해 말한다면 나는 잠자코 있어야 할 사람이다.
    좋아하는 시인이나 시, 소설가, 소설이 없는 내가 문학에 대해 말해 뭐하겠어.
    하지만 네가 말하는 문학은 암담한 미래만 남아있는 것이 아닌것 같군.

  4. 2006/11/22 13:50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음음, 좋은 글이야.
    그런데 갑자기 드는 생각.
    '문화적인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창작하는 사람들보다는 그걸 하나의 '생산-소비' 체계로, 산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추세에 과민하게 반응한다.'
    이것을 음반시장과 비교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까? 실제로 가수들은 음악을 창작으로도 생각하긴 하지만, 생을 연명하게 해주는 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면이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mp3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수들을, 음악을 산업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간주하여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고 보는데, 형의 의견은 어때?

  5. 未完 2006/11/22 17:07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뭐, 그런 생계수단으로서의 측면은 문학에도 비슷하게 존재하리라 생각하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뭣보다 '소비자'의 측면에 있으면서도 '창작자'를 가르치려 드는 비평가들의 이상한 행태야. 음악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하드 리스너라든가 하드 리더(라는 말은 없지만)들은 그들의 취향이 다른 이들의 취향보다 고급이고 무언가 더 높은 차원의 독해라는 생각을 하지.
    그게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진실을 말할 수 있지만, 창작이라는 면에 있어서까지 동등한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냐면, 창작하지 않는 사람이 창작물에 대해 말하는 건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는 거지. 문학에 종언을 고하려면 지금 창작하는 사람들까지 다 무덤에 묻고 흙을 잘 덮어줘야 할텐데, 그게 '소비자'의 입장에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인가.

    아무튼 mp3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걸 실제로 '창작한'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일 거라 생각해. 물론 여기서 '창작'에 속하는 음악은 좀 한정되어 있겠지. 애초에 '상품'의 속성으로 나오는 음반도 많으니까. 돈 주고 사는 건 전부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돈'을 의도했느냐 아니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표현했느냐에 따라 좀 더 세분화시킬 수 있겠지. 그런 창작자들은 음악을 '산업'으로 생각해서 그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생각한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게 화가 나는 건 아닐까.

  6. 김혜영 2007/07/13 07:17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우리는 공허를 참을 수 없다


    한동안 아픔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듯 생활하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으며, 나의 나약함에 대해 전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의 나약한 육신은 언제나 조금 나의 발꿈치를 붙들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는, 구름을 치려는 욕심으로 끝까지 오르고 파멸해버리는 덧없음을 막아주는 고마운 족쇄인지도 모른다.



    육신의 아픔으로 인해 오랫동안 어떤 생각도 오래 하지 않았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든 내 몸으로부터 이 병을 가능한 빨리 나가게 하는 것이다. 약에 지친 육신은 정신을 괴롭게한다. 나는 이러한 상태로 명료하고 아름다운 이해를 도모할 수 없으며, 내게는 병에 대한 강박만이 남는다. 이러한 마음의 속임수를 뒤로하고 평생 지병에 저항하며 작품활동을 해온 여러 작가들이 얼마나 어려운 것을 얻어낸 것인가 다시 생각해본다.



    이런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먹고, 잠들기 위해 누워있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도 아무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읽기'를 하는 것이다. 고민도 걱정도, 사상(思想)에 대한 궁리도 병을 몰아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랜 시간 누워있다보면 그러할 힘조차 없다. 따라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도 아무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읽기'를 계속해서 하게된다. 이 일에 빠져들다 보니 며칠동안이나 단 한 자의 그리스문자도 거부하였던 일조차 죄책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스스로 죄를 면한 것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어떤 생각도 모두 없어졌을 뿐이다.



    그러한 읽기를 계속 하면서 내가 얻는 정보의 양은 실로 대단하여 스스로 뿌듯함을 얻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읽기가 끝난 후가 문제이니, 읽기 후엔 언제나 어떤 공허함이 머리에 가득해 찝찝한 꿈을 꾸고 아직 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나를 사로잡는다. 온갖 뉴스와 사람들 사는 이야기, 굉장히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은 내게, 멈추고 사색할 기회 같은 것은 애초에 제안하지도 않고 도저히 그런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 것은 완벽히 짜여진 도안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동산과 같아서, 놀이기구들은 이 재미에서 저 재미로 나를 몰아갈 뿐, 나로하여금 그 재미의 본체(本體)가 신경을 속이는 거짓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속임수에서 스스로를 건져낼 수 없는 인간은 무엇인가. 다름아닌 공허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편안한 잠을 자고 좋은 것을 먹고 아름다운 것을 입어도 인간은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하다. 문명이 발달하여도 가진자의 행복이 도약하는 것은 아닌데,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어떤 행동의 주체로 결정지어야만 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그 누가 되었든 인간은 생각하여야 하고, 그렇기에 '생각할 거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읽을거리는 그 필요를 채워주는 굉장한 방편이다. 내가 생각할 적에 인간이란 존재자에는 아주 거대한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이 구멍은 아무것으로나 쉽게 막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 구멍을 막기 위해 인간은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이것은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질이 좋은 것'으로만 조금씩 매워나갈 수 있기 때문에 인내와 희망이 없이는 이 구멍을 죽음 이전까지 채울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인내를 떠난다. 그리고 그 거대한 구멍을 막아볼 임시방편을 사기 위해 인생의 '시간'을 값으로 지불한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홍수처럼 떠밀려와 끊임없이 구멍을 통해 빠져나간다. 인간은 그 구멍이 비어있는 것을 애초에 아주 견딜 수 없어 하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그 구멍을 매꿔나갈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라도 구멍을 막아야한다. 이것은 끝없는 댓가를 요구하여 끝없는 공허를 불러오지만, 정작 정보의 홍수 속에서 뚫린 구멍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그 순간엔 인간은 자신이 공허하단 사실 조차 잊고만다. 인간은 이토록 처량하고 작은 존재자가 될 수 있다.



    그 구멍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궁극의 공허에서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 하나의 무엇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은 '참된 생각할 거리'라는 것이다. 홍수처럼 밀려와 우리를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발꿈치를 언제나 조금 잡고 있는 아픔처럼 우리를 멈추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로는, 인문학이 바로 그것이다. 인문학이 무참하게 죽어 나가떨어지는 현시대에 인간의 필연적인 공허를 채워줄 수 있는 무엇이 우리에게 남아있는가. 광(光?狂?)선을 타고 도는 광(廣?狂?)대한 정보만이 우리의 구멍을 통해 신들린 듯 빠져나가고 있을 뿐이다.











    2007년 7월 12일 오전나절

    친구 未完을 위해 이 글을 쓰다





    김, 엔젤 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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