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후의 우리사회의 문학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서 술을 훨씬 안 먹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으로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한다면 별 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고서 술을 안 마신다면 큰일입니다. 밀턴은 敍事詩를 쓰려면 술 대신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읍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읍니다.[……]

- 김수영,『김수영 전집 2-산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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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에 와서 위 인용문은 어쩌면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술 마시며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헛소리를 토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다니, 이해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토익·토플 공부하기도 바쁘고, 취직을 위해서 공부하기도 바쁜 시간에 술을 마시라니 웃기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김수영의 이런 발언이 순수하게 젊은이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취직과 자격증 이야기에 대해 한 두마디 툭툭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명절 때만 마주치는 친척어른이든, 오랜만에 만난 옛 은사든간에 이 시대에는 별 의미없이 습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용문과 같은 말은 듣는 사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말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술을 안 마시고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술 따위 마실 필요가 없다. 취직을 위한 공부가 술 마시고 인생을 논하는 것에 비해 훨씬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술 같은 건 절대 마셔서는 안 된다.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기 때문이다. 일 분 일 초라도 아껴야 할 시간에, 다음 날까지 숙취를 유발하는 술을 퍼마셔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사실 나로서는, 술 한 잔 마시는 것과 취직 공부 사이의 무게를 자신있게 잴 수가 없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입대 후에 많은 것을 얻은 자리가 바로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리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취직공부에 비해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평가절하하는 것은, 뭣보다 젊은이들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어서어서 돈을 벌어서 저축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텐데, 또 노후도 대비해야 자식들에게 구박받지 않을텐데. 그런 식으로 따지다보면 결국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쳐야만 하게 된다.
  이런 식의 논리는 뭣보다 스스로가 겪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미리 판단을 내리고 결정하기 때문에 견고하게 굳어진다. 사람은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 뭐든 자꾸 원하고 바라고 가지고 싶어하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살아가는 데 큰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만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것이다. 이건 얼마 살아보지 못한 나도 장담할 수 있다. 큰 돈 없이도, 수 억원의 재산 없이도 한 가족은 나름의 행복을 꾸려나갈 수 있다.
  늘상 말하는 것이지만, 이건 돈이 필요 없다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취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취직공부를 하려면 우선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뭘 해서든 먹고 살 수 있다.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걸 명확하게 알지도 못한채 막연한 두려움으로 내몰리는 것은 굉장히 우습다. 아직도 나는 그다지 위태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이건 내 인격수양이 아직 덜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저 인용문 다음 문단 마지막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것은 결코 책임없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의 책임은, 서양의 옛말에 있듯이 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은 꿈을 꾸기 위해서다. 그리고 꿈이 없이는 책임도 없다. 꿈이 없는 인간은 자기의 인생에 대해 진정한 책임을 질 수 없다. 술 없이도 꿈꿀 수 있는 자에게는 술이 필요 없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도 꿈꾸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책임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인생의 도피행각일 뿐이다.

[……]글을 쓰는 것과 돈벌이를 혼돈하지 않은 지이드같은 문인에 대한 - 즉 돈에 대한 - 선망은 피상적이다. 글을 써서 돈을 벌 필요가 없을만큼 돈이 있다해도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 돈은 어디서 생겼는가? 누가 어떻게 해서 번 것인가? 그러니까 역시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면서,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는 자기자신과 싸워가는 수밖에 없다. 요는 휴식을 바라서는 아니되고, 소음이 그치는 것을 바라서는 아니된다. 싸우는 중에, 싸우는 한가운데에서 휴식을 얻는다. 이 말도 말로 하면 싱겁게 된다.[……]

- 김수영,『김수영 전집 2-산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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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를 하고 나니 세상은 다시  '이곳'이었다. '이곳보다 더한 이곳'이었다. 생활이 돈과 직결되는, 심지어 동의어가 되는 세상은, 확실히 녹록치 않았다. 내가 2년간 있었던 '이곳'이 연차에 따라 계급을 세웠다면, 지금 '이곳'은 소유한 부에 따라 계급을 세운다. 지금 '이곳'에서는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기형도)를 세워야 한다. 다만 계급장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 오히려 지금 '이곳'의 계급장은 더욱 더 잘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로 마음먹은 딱 그만큼, 당장 생활에 들어가는 돈이 궁했다. 집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영 내키지 않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당장 달려들어서 열심히 하는 수밖에.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지이드처럼 돈이 많다면 김수영과 같은 마음으로 불편해할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내 자신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돈이 많아서든 그렇지 않든 '생활과 싸우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은 참으로 맥이 빠지는 놈이라는 것이다. 생활에 탄력이 없어지고, 한없이 늘어져서 책을 읽는 속도도 일을 할 때보다 느려진다. 그러다가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의미도 없고 불쾌하다. 결국 나는 김수영의 말에 공감한다. "싸우는 중에, 싸우는 한가운데에서" 휴식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 말도 말로 하면 싱겁게 된다."

  내가 제대를 하고, 내 동생은 몇 주 뒤에 제대한다. 나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기억이 없는 국가는, 나와 내 동생이 국가의 부름에서 벗어났으니(즉 어떻게든 돈을 벌 수가 있으니), 3급 장애인인 아버지에게 지원하던 의료비는 더 이상 국물도 없다고 말한다. 뭐 열심히 벌면 그깟 약값이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내가 졸릴 때 잠 안자고 경계근무를 서던 2년은, 또는 자다가 일어나서 같은 군인의 상처를 돌보던 2년은, 갑자기 꽤나 값싸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은 참으로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싸우기로 마음먹었더라도,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참고글 : 다시 이곳을. 이곳보다 더한 이곳을.

[……]나는 자신에 관한 비평이란 걸 전혀 읽지 않는 인간이다. 그래도 간혹 기분이 내켜 읽거나 하면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하고 생각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명명백백하게 빗나간 추측도 있고, 노골적인 개인 공격도 있고, 책을 마지막까지 읽지도 않고 썼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따라서 무슨 소린지도 모를 비평이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사정을 고려한다 해도, 작가가 비평을 비평하거나, 거기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변명을 하거나 하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쁜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말똥이 듬뿍 들어차 있는 오두막과 흡사하다. 만약 우리가 길을 걷고 있을 때 그런 오두막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서둘러 지나가 버리는 게 최상의 대응책이다. '왜 이렇게 냄새가 나지'라는 등의 의문을 품어서는 안된다. 말똥이란 원래 냄새가 나는 것이고, 오두막의 문을 열기라도 했다가는 더욱 냄새가 진동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무라카미 아사히도의 역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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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나는 비평에 대해 잘 모르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그러나 내가 비평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비평가들은 자신이 비평하는 대상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비평하는 작품을 쓴 작가가 정말로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게 가능하냐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실례가 있다.

  리처드 바크만Richard Bachman이라는 작가는 비운의 생을 살았던 작가다.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1977년『분노Rage』라는 작품을 발표한 뒤로 한물 간 스티븐 킹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대주라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스티븐 킹은 평론가들로부터 통속적인 대중소설가로 대접받던 중이었다.
  리처드 바크만에게는 아내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우물에 빠져 죽었다. 그는 슬픔을 이겨내기 어려웠지만 더 큰 고난이 닥쳤다. 1982년에 그의 뇌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은 것이다. 스티븐 킹은 자신과 비교되는 신인작가 리처드 바크만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1985년, 바크만이 필명 암(cancer of pseudonym)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손도 못 쓰고 죽었을 때 스티븐 킹은 "구역질나는 인간… 그가 죽어버려 기쁘다"고까지 소감을 밝혔다.
  사실 이 비운의 작가 리처드 바크만은 바로 스티븐 킹의 또다른 분신이었다.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이라는 서점 직원이 이 사실을 밝혀낼 때까지 자그만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의 수많은 평론가들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리처드 바크만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여위어라Thinner』가 1984년 발표된 이후에 조금씩 동일인물설이 떠돌았지만, 직업적인 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어떤 분명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에밀 아자르Émile Ajar 역시 비슷한 경우에 속한다.『유럽의 교육』으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Romain Gary는 텍스트를 보지 않고 기성 작가로 자신을 판단하는 프랑스 평단에 염증을 느꼈고, 자신의 조카를 내세워 에밀 아자르라는 새로운 작가를 탄생시켰다. 이때 로맹 가리의 나이는 60세. 프랑스 평단은 이 '신인 작가'의 뛰어난 글에 열광했고,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떠들고 다녀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 "로맹 가리는 끝난 작가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등등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심지어 어떤 비평가는 에밀 아자르의 첫 작품인『열렬한 포옹』의 작가로 레이몽 크노와 아라공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그 정도의 위대한 작가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밀 아자르의 두 번째 작품『자기 앞의 생』은 1975년 공쿠르 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로맹 가리는 이를 거부하는 편지를 조카를 통해 보낸다. 왜냐하면 공쿠르 상은 한 번 수상한 작가가 다시 수상할 수 없는데, 로맹 가리 자신은『하늘의 뿌리』로 1956년에 이미 공쿠르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한 공쿠르 아카데미는 그의 수상 거절을 거부한다. 결국 그는 유일무이한 '공쿠르 상 2회 수상자'가 되었다.
  1980년 로맹 가리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6개월 뒤,『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소책자가 발간되었다. 그는 여기에 에밀 아자르에 대한 모든 비밀을 밝히고 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것은 특히 비평가들 사이에서 더 심했다. 로맹 가리는 자살하기 다섯 달 전에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무명이었을 뿐이네."

  물론 이런 일화들이 비평의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분명 작품에 빛을 비춰주는 비평은 존재하며, 그런 연구들이 모여서 문학의 학문적인 분석방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리라.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비평이 다만 말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평과 분석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정말로 작품을 읽는 예리한 감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정말로 중요한 무언가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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