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자본'을 읽어보지 않아서, 자본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공산당 선언'을 통해서 알게 된 단편적인 것 몇 가지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 비판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산력'과 '소유관계'에 대한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가 폐지를 주장한 것은 '사적 소유'인데, 이것은 나이든 사람들이 헐뜯는 것처럼 '그냥 부자들이 눈꼴시러워서' 주장한 게 아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사적 소유관계'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이, 현대의 급속하게 팽창한 생산력을 지탱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는 반복되는 활황-불황의 문제를 들고 있다. 너무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는데, 그 생산된 물건은 '사적 소유'로 모두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 다른 말로 하자면 '사적 소유'로 인해 제한되어 필요한 물건을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 잉여 생산물이 과도하게 축적되고 그것이 공황을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적 소유의 폐지'만이 현대 사회의 괴물같은 생산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공산당 선언'에서 이 내용은 "지하 세계에서 불러낸 괴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된 마법사 같은 꼴"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 빈부의 차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문제에 기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중산층'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가정해야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데, '사적 소유'라는 관계가 부의 편중을 초래하는 구조적인 장치의 역할을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 시대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그 뿌리를 파헤쳐보면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유방임주의'의 또다른 표현이 '신자유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자의 핵심적인 결과는 '극심한 빈부의 차'와 '시장의 실패'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결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저에 있는 심리적인 지지틀이 '제국주의'라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애덤 스미스 시절의 제국주의는 '다수의 제국'과 '눈에 보이는 식민지 통치'라는 방식으로 성립되었지만, 이 시대의 제국주의는 '하나의 제국(미국)'과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문화, 식료품, 공산품 등등) 식민지'로 성립되어 있다.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제 세계가 단일한 구성체에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대공황과 같은 사태가 다시 한 번 벌어진다면, 그때 전세계는 심각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대한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일부 설명해준다. 미국의 힘은 국방력이나 국토의 광대함, 세계 자본의 집결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전 세계를 먹여살리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 문제는 세계의 경제 문제가 되어버리고, '플라자 합의' 같은 일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는 '미국 타도'라는 구호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미국이 당장 망하기라도 한다면, 이후의 진행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3차 세계대전을 논하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수정이나 전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 부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이 세계는 어떤 하나의 이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가 아닌 것이다.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2006/12/13

[……]인텔리 계층의 미국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인종 차별과 관계 있는 말은 입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유주의자일지라도 지리적으로는 아주 분명하게 차별적인 언급을 한다. 이건 무척 재미있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112번지에서 북쪽으로 가면 안 돼요. 그 근처는 위험한 동네니까"라는 식의 말들을 거리낌없이 입에 올린다. 심지어 일부러 지도에 "여기서부터 북쪽으로는 가지 마시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는 가지 마시오"하고 표시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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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과적으로는 112번지로부터 북쪽의 위험한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94퍼센트는 예를 들어 흑인일 경우가 있다. 그건 차를 타고 지나가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요컨대 "여기에서 더 북쪽으로 (예를 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이 살고 있어 마약에 관련된 살인 사건 등이 자주 일어나니까, 무엇보다도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라는 뜻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니까 지리적인 표현으로 바꿔서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아주 태연하고 명쾌하게 그런 식으로 바꿔 표현하는 걸 보면, 나는 항상 '정말 그럴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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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슬픈 외국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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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는 시기에, 여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불만을 표출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불만을 좀 표출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굉장히 보수적이며 또한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글을 읽는 분들은 이 점을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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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태도'를 의미하지만, 이는 대부분 '언어 표현의 수정'이라는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다. 이것은 '완곡어 운동'이라 불리는데, 나는 이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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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곡어 운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많은 '차별 용어'에 대한 금지 및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의 사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것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는 거의 완전히 정착된 상태로, 예를 들어 대화 중 anyone을 무심코 he로 받으면 바로 주의를 받을 정도다. 성이 Goodman인 코네티컷의 한 주부가 Goodperson으로 바꾼 예조차 있다. 한국에서도 '호모' 대신 '동성애자'라는 용어가 정착되었고, '살색'을 다른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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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운동은 기본적으로 '언어가 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에 바탕하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세계가 더 좋아지거나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학적으로 '사피어-워프 가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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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분명 세계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지만,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석의 말대로, "적어도 일반적 수준에서는, 언어가 사고의 흔적이고 세계관의 흔적인 것이지, 그 거꾸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 우리의 사고방식을 규정하거나 세계관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완곡어 운동'의 현실적 실효성은 생각만큼 강력하다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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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완곡어 운동'은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은폐하기도 한다. 위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저런 방식의 '완곡어'는 실제 흑인들의 생활방식과 문제점을 가린다. 또다른 예로,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장애우'로 바꿔 사용하자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처지는 '은폐'되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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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완곡어 운동'을 포함한 '정치적 올바름'이 급진적으로 나아가서 하나의 근본주의를 형성할 위험성 역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도살장'은 차별용어이기 때문에(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의 <Slaughter House 5> <5번 도살장>이 아니라 그냥 <슬로터 하우스 5>로 출판되었다. 미국에서는 낙태 반대론자가 낙태 수술을 하는 의사를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억압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차별에 반대한다)을 상대방에게 강요함으로써 그것이 또다른 '억압'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완곡어 운동', 또는 '정치적 올바름' 전체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억압받는 소수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는 태도'는 분명 권장할만한 것이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다양성'을 억압하고 하나의 '근본주의'로서 자리잡는 경향이다. 그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정치적 올바름'은 기존의 소수들을 보호하는 대신 또다른 소수들을 억압하는 것으로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하고, '완곡어 운동'에 대해 심정적인 지지를 표하는가? 그것은 이미 앞에서 썼던 말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내 사고가 언어의 결과물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 사고의 흔적인 것이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 우리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내 언어를 수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언어가 나의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지 않고 '무엇을 사고하는가'에 있다
.
 
따라서 나는, '정치적 올바름'이나 '완곡어 운동'에 대한 반감은 이해하지만, 그것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인간의 발언은 경멸한다. 자기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뒤에 말하는 것과, 자신의 발언이 내뱉어진 뒤에 그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정치적 올바름'이 하나의 상식이 된 요즈음에 이르러서 이런 '합리화'의 경향은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것은 표리부동한 자세로 인해 실제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편견을 편견이라고 인정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쪽은 적어도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또는 실제로 차별하고 있는 것들)을 과대포장하거나 은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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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이며, 따라서 어떤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할 기준을 누군가가 (그게 누구든) 갖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치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의 기준에 대해서 고민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다른 것들을 말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내 기준을 굳이 남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나는 '자기 자신의 내적 성찰'없이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 '형식적 절차'로 지키거나, 반대로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 '욕망의 억압'이자 '강요되는 구조'로서 반대하는 것을 경멸할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사회의 실제적인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에
.
 
결국 '페미니즘'을 포함한 '정치적 올바름', (강유원의 말을 빌리자면) "실천되어야 할 이데올로기"이지, 결코 "공부해야 할 주제"나 사물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준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순서가 바뀌면 그 행동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입바른 말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든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이 실제로 건강하기만 하다면. 반대로 그 사람이 말을 아무리 건강하게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실제로 건강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 썅.

  내가 더 이상 소설 쓰지 말라고 했지!


  참고글 : 『칼의 노래』를 다 읽다



  ...『현의 노래』도 일부러 안 읽고 있는데.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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