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학에 대해서 최근 생각한 것.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상품이 만들어지는 노동의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자유주의 경제학(주류 경제학)은 상품이 유통되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자본이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 '노동가치와 임금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임금은 그의 노동을 100% 교환가치로 전환했을 때보다 항상 적다'는 것이다. 자본이 상품을 만들 때 드는 비용은 '고정 비용'과 '비고정 비용'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계의 유지/보수나 건물의 임대비용, 세금, 유통비용 같은 것들은 고정적이므로 쉽게 줄일 수 없다. 결국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임금을 그것이 본래 받아야하는 가치보다 덜 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논리가 노동권의 신장에 주된 역할을 했으며, 나 역시 이것이 잉여가치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주류경제학은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상품'의 '수요-공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잉여가치 생산의 구조'는 이 속에 자연히 포섭되는 것이다. 소비자의 수요가 있고, 그에 따라 가격은 조정된다. 그리고 그 가격에 따라 고정비용을 제외한 나머지가 노동자의 임금이 되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나 또한 이 논리가 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문제는 다시 이 지점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오로지 '노동자의 임금'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탄력을 갖게 된다면, 자본가는 순수하게 시장의 균형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시장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밀턴 프리드먼 같은 - 은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인간은 그것에 조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이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약한 인간이 다른 강한 인간에게 무릎 꿇는 것이 반드시 인간의 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잊고 있는 것 같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유택은 경제학과 교수이다. 그는 항상 '경제학은 인간의 학문이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경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경제는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 당위로서가 아니라 연역적 추론으로서 - 강하게 요청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거기에는 동물과는 다른 방식의 무엇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데에 나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2

  뉴턴은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의 두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밝혀졌듯이, 뉴턴의 근대적 과학연구는 그의 생애에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대부분 전념했던 것은, 연금술과 그노시스(gnosis, 영지주의) 연구였다. 그는 '최초의 근대인'보다는 '마지막 중세인'이라는 말에 더 걸맞는 사람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책에서, 줄곧 자신이 기대했던 문학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의 주된 논지는 문학이 지금까지 맡아왔던 책무를 이제는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문제가 더 이상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대해 문학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로 드는 작가 중 한 명이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나는 이 논리에 대해 아주 강한 회의를 품고 있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하루키는 '근대문학에서 벗어난 첫번째 세대'라기보다는 '마지막 근대문학자'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진이 말하는 이른바 '근대문학'의 특징이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의견의 표출인데, 하루키는 그것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교묘하게, 지금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진행시키고 있을 뿐이다.
  하루키를 '처형'했다고 하는(김춘미 교수) 고모리 요이치의 글은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하루키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월드 와이드 웹(WWW)과 동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어필하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고진의 말대로 국가와 자본, 네이션의 운동은 끝난 게 아니며 오히려 지속되고 있다. 문학이 만약 그 임무를 맡는다면,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이른바 '근대문학'의 틀을 '형식'에서는 벗어났을지 모르나, '문제의식'에서는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국가와 자본의 운동에 극히 강하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하게 읽힌다고 해서 반드시 소프트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독자의 문제의식이 소프트한 것에 불과하다.

2007/03/08

  문득 떠오른 단상. 이런 건 까먹기 전에 써야 오래도록 남고, 또 나중에 잘 정리해서 쓸 수 있다.
  내가 아직 군에 있을 시절에 썼던 글 중에 <'탈근대적 거짓말'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경제구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는 아직 근대 - 제국주의와 약탈과 정복을 기반으로 한 - 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제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으며, 그 구조는 오히려 점점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자연사적 필연은 '공산사회로의 이행'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견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탈근대' 논의는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절대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탈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풀만 먹는 호랑이'라는 말과 똑같다. 그런 것은 아직 등장한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읽으면서, 이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가 탈근대 사회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지만, 그리고 또 그것을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무력화(無力化)되기 때문이다. 그게 왜 현실에서 무력화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자본주의 문제의 해결 없이, 우리는 근대와 그것의 폐해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없이 추구하는 이상(理像)은 결국 그냥 공상으로 끝나기 쉽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생존'이 가능한데, 그 '생존'의 문제가 매여 있는 한은 '이상의 추구'도 '탈근대화'도 뜬구름 잡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줄에 묶인 개가 아무리 멀리 벗어나려 한다고 해도 다시 개줄이 묶인 말뚝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의 성립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그 궤를 같이 했으며, 그 성장 또한 함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탈근대를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지 않고 탈근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사람은 사기꾼이다. 그들을 믿지 말라.

2007/01/13

  저번 주말에 도서관을 갔는데, 그 김에 '현대문학' 6월호를 찾아내어 유종호 씨의 특별기고를 읽었다.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하루키 현상과 무엇무엇의 몰락'이던가, 뭐 그런 식의 제목이었다.
  유종호 씨가 그런 글을 썼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들춰보았는데, 정말로 하루키의 글에 대한 일반적인 폄하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주요 요지를 말하자면 자기가 한국 대학생들의 문학 취향을 10년 가까이 조사해왔는데, 요즘들어 일본 작가의 비중이 높아지고 그 중에 특히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나보다. 그런데 그 소설은 대중문화의 편린 같은 것이고 허섭 쓰레기 같은 문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단다. 이전의 수준높은 문학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이런 문학들이 자꾸 자리잡아가고 있기 때문이고, 이런 문학은 아직 '계몽되지 않은' 독자들에게 읽혔을 때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도 말한다.
  (내가 요약을 일방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글의 내용을 온전히 요약했을 때 저런 식의 발언으로 정리할 수밖에 없다)
  그의 그 '특별기고'라는 것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은, 그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반성이 전혀 없다. 왜 이 시대의 학생들이 일본 소설에 열광하게 되었는지, 그 중에서도 어째서 하루키인지에 대한 사회적·구조적 분석이 전무하다. 그냥 쉽게 읽히니까 너도나도 읽는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2차대전 즈음에 베스트셀러였던 데미안은 쉽게 읽히니까 베스트셀러가 되었나? 아니면 이전 세대에 비해 이 세대의 문학 수준이 대폭 낮아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글을 읽어보면 바로 그런 의미의 말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이 시대의 문학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 그런 문학은 '문학도 아니라는' 것. 유종호 씨의 글은 그런 의도로 읽힌다. '계몽되지 않은 독자'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문학 수준(이라는 게 있다면)의 기준을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본질적인 의문을 담고 있으며 대중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삼는다면, 나 역시 그의 발언에 동의한다. 이 시대의 독자층은 확실히 이전 시대에 비해 좀 덜 어렵고 쉽게 읽힐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대중'의 범위와 규모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우리나라 독자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내려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문학자들, 특히 비평가들이라는 사람은 왜 이렇게도 문학 이외의 매체에 대한 고민이 전무한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문학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대중적인 문학이 왜 인기 있는가가 아니다. 본래 대중은 대중적이고 편안하게 다가오는 글쓰기를 선호하기 마련이고, 그건 여타 다른 매체에서도 다르지 않다. 대중은 대중적인 것을 선호하기에 대중인 것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 집단을 우리는 대중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문학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왜 읽히지 않는가이다. 왜 문학은 읽히지 않는가? 이 전반적인 상황 자체를 규정해야 한다. 팝적인 글쓰기를 '상품'이라고 친다면, '상품'이 아니라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작품은 왜 읽히지 않는가? 그런 범위를 최대한 넓게 적용했을 때조차 읽히는 규모가 점점 줄어들어만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당연하게도, 유종호 씨가 한창 팔팔할 때에 비해서 다른 할 게 많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시간이 남아돌 때 할 수 있는 건 책읽기 밖에 없었다. 다른 건 당구를 치든 롤러스케이트를 타든 밖에 나가야 하는데,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책읽기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읽기가 여가의 매체로서 가지는 힘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도 할 게 너무너무 많다. DVD도 봐야 하고, 웹서핑도 해야 하고,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뮤직비디오를 감상해야 한다. 책처럼 지루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며 중간에 중단하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매체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먼저 고민하지 않고 독자의 수준 운운하는 것은 비평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하루키의 글이 과연 '퇴폐적이고 무의미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아마 유종호 씨는 하루키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연구해보지 않은 듯 하다. 하루키에 대해 꽤 깊은 식견을 갖고 있는 동료 비평가 남진우 씨에게 조금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것을. 쉽게 읽힌다고 그냥 그렇게만 판단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작가가 어떤 세계를 추구하는지에 대해 파악하지도 않은 채 그의 문학을 섣불리 말하는 사람을 비평가라고 불러도 될까?

2006/12/15
◀ PREV : [1] : [2] : [3] : [4] : [5] : [6] : [7] : .. [13]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