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다(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 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밑줄:인용자)


- 진중권,『씨네 21』555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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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킬 수 없는 말을 한 인간은 얼마나 불행한가. 그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기에 불행하다.
  지난 2년의 군생활 동안 진중권 만큼의 엄청난 글은 아닐지라도, 나 역시 규범적인 - 즉 책임져야 할 - 글쓰기를 했다. 그것들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으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나를 목졸라갔다. 나는 지키지도 못할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의문은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나는 전역하기 두 달 전부터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인간은 지킬 수 없는 글이나 말을 내뱉게 되는 걸까. 그건 물론, 글쓰기의 주체와 삶의 주체가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잠시나마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한다. 글은 고정된 것이고 삶은 변화한다. 그것도 일분 일초 단위를 뛰어넘어 쉴새없이 변화한다. 작은 일로도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바뀌고, 그때의 인간은 이미 그 전의 '글쓰기 주체'와는 다른 인간이 된다. 넘을 수 없는 벽이다.
  글쓴이와 '글'과,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괴리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아무리 세뇌해도 그 분열은 자기혐오를 만든다. 합리화도 한 두 번이고, 분열-통합의 반복도 정도가 있다. 자신의 글을 보고 삶과의 괴리에 구토가 치밀어오르는 지경이 되면 더 이상 글같은 건 쓸 수 없게 된다. 제로 디그리. 막장이다.
  입을 다물고, 펜을 넣어둔 채 조용히 사는 것이 가장 괜찮은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글이나 사상의 완벽한 실천으로서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그런 조건 하에서는 차라리 글과 사상을 버린 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실천에나 힘쓰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질문은 끝까지 나를 붙잡는다. 그렇다면 글은 왜 쓰는가? 아니 그 이전에, 어째서 필요한가? 너는 무엇 때문에 생각하고 있는가? 왜 살아가고 있는가?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밑줄:인용자)


- 김수영,『김수영 전집 2-산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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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초년 시절, 경영학을 전공하는 한 후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같은 걸 왜 읽는 거죠? 다 거짓말이고 뻔한 이야긴데, 읽어서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어요."
  꼴에 문학도라고, 어떻게든 답변을 해주려 했지만 결국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 뒤로 저 질문은 나를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문학의 효용이란 게 사실 별 게 아니다. 읽고 눈물 줄줄 흘리는 것이 효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즐겁게 껄껄 웃고 지나가는 것이 효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것이 허구라 할지라도 현실이 되기를 지향하면서 글을 쓴다. 그것도 작품의 표면적인 것이 현실이 되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자 한 일말의 진실이 현실의 세계에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쓰는 것이다. 자꾸 되풀이해서 소리높이다보니 이루어지는 헛소리의 기적. 시의 기적. 문학의 기적. 저항문학도, 참여시도 그런 의미에서 이루어져 왔다. 김수영의 저 문장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숙제를 상당부분 풀어주었다.
제대병(除隊兵)

기형도


위병소를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본 1982년
8월 27일의 부대 진입로 무엇이 따라오며
내 낡은 군복 뒤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었을까
부르느냐 잡으면 탄피처럼 후두둑 떨어지는 사계(四季)
여름을 살면서 가을을 불시착하고 때로는
하찮은 슬픔 따위로 더러운 그리움으로
거꾸로 돌아가기도 했던 헝크러진 시침(時針)의 사열(査閱)

떠나야 하리라
단호히 수입포 가득 음습한 시간의 녹 닦아내며
어차피 우리들 청춘이란 말없음표 몇 개로 묶어둔
모포처럼 개어둔 몇 장 슬픔 아니던가
많은 기다림의 직립(直立)과 살아 있지 않음들 또한 땅에 묻히리라
잊혀지리라 가끔씩 낯선 시간 속에서 뒤늦게 폭발하는
불발탄의 기억에 매운 눈물 흘리며
언젠가는 생을 낙오하는 조준선 위로 떠오르는
몇 소절 군가의 후렴에 눈살 찌푸리며 따라 일어설
추억들이란 간직할 것이 못 되었다.
물론 먼먼 훗날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敬禮)의 날을
살아가다가 거리에서 문득 마주치는
군용 트럭 가득가득 실린 젊음의 중량 스쳐가며
마지못해 쓸쓸히 웃겠지만
그때까지 무엇이 살아 있어 내 젊은 날 눈시울 축축이 적셔주던
흙길의 군화 자국 위에서 솟구쳐올라
굳은 땅 그득히 흘려줄 내부의 눈물 간직할 건가

잘 있거라 돌아보면 여전히 서 있는 슬픔
또한 조그맣게 잘리며 아스라히 사거리(射距離)를 벗어나는
표적지(標的紙)처럼 멀어지거늘
이제 나는 어두운 생의 경계에 서서
밤낮으로 시간의 능선(稜線)을 넘어오는 낮은 기침 소리 하나하나 생포하며
더욱 큰 공포와 마주서야 하는 초병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잘 있거라 내 젊은 날 언제나 가득히
그 자리 고여 있을 여름, 그 처연(悽然)한 호각 소리여
훈련이란 우리들 행군간의 뒤돌아보지 않는 연습의 투사(透寫)일진대
오,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하늘
입간판(立看板)을 돌아설 때 한꺼번에 총을 겨누는 사계(四季)
뒤돌아보면 쏜다. 그리하여 두 손 들고 내려오면 위병소
그 질척한 세월의 습곡(濕谷) 아아, 사나이로 태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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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이맘 때를 뒤돌아본다. 그때 나는 어떤 심장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던가. 형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불안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보냈던 시간들. 5월 27일은 내게 생의 종말과도 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나 입영영장은 내 생의 유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집단 속에 밀어넣었다.
  비워진 관물대를 묵묵히 바라본다. 청바지보다 익숙한 전투복, 구두보다 잘 맞는 전투화. 2년 동안 내가 살았던 이곳은 이제 나에게 나가라고 명령한다. 나를 이곳에 밀어넣었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나를 다시 세상으로 밀어넣는다. 내 입대 전의 삶에 유예의 시간을 주지 않았듯이, 이제는 내 제대에 유예의 시간을 주지 않는다.
  <떠나야 하리라>. <계급장 떼어버린 더욱 각도 높은 경례의 날을> 살아가기 위해서. 아마도 나는,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이곳 하늘을 올려다보리라. 여유없던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하늘, 이제 겨우 여유 생겨 올려다보게 된 하늘. 그러나 그 하늘 오래 볼 수 없으리라. 내가 이곳에 둔 두 번의 사계는 나에게 총을 겨누리라. <뒤돌아보면 쏜다.> 나를 밀어내리라. <그리하여 두 손 들고 내려오면 위병소>. 아아, 다시 이곳을. 이곳보다 더한 이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