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기에, 성의를 갖추고 논쟁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시간이 주어졌기에 글을 씁니다.
  제가 지X 씨의 문제제기에 대해 줄곧 취해 온 입장은, 지X 씨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X 씨의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비문이 많고 내용의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지X 씨가 올려주신 페이퍼와 새로운 답글들을 읽고, 조금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X 씨의 문제제기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들인 시간의 대부분을, 저의 논리를 가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X 씨의 의견을 정리하는 데 써야만 했습니다. 정리된 형태의 글이 아니라 답글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는 생각의 조각들과, 올려주신 페이퍼에 있는 내용을 '추출'해서 지X 씨의 주장을 구성하는 데에 꽤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지요. 박사과정 중이시니 바쁘신 거야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써서 글을 써주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 들었습니다.

  지X 씨가 던진 질문을 재구성해서 압축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a) 제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힘'에 대해 누군가 글을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 세계질서라는 것이 혹은 세계평화라는 것이 '힘'에 의한 정치이고, 그렇다면 '한국'이 지향하는 것은 그런 '힘'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는 것인지, 그런 식의 세계질서체계를 수정하려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국제정치에 대해 쓰고, 그 다음에 지X 씨의 의견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국제정치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앞의 답글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듯, 국제정치에서 '힘(Power)'라는 것은 "자식의 목적이나 목표를 실현하는 능력"입니다. Robert Dahl은 "없다면 하지 않았을 일을 타자에 대해 시키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작용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이쪽이 움직임으로써 상대가 했다면, 이쪽은 상대에 대해 힘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로 이런 '능력'을 측정하는 것은,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보통은 '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나누게 됩니다. Joseph Nye는 이 '힘'을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로 나누고 있는데, '하드 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의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힘, '소프트 파워'는 문화나 학문, 스포츠와 같이 '간접적인 효과'를 가지는 힘입니다. 이러한 '힘'의 정의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Balance of Power'(세력균형) 이론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사람들이 폐기되어야 할 이론이라고 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제정치의 구도와 변화를 설명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요. 그리고 또, 많은 것들이 변한 현대사회에서도, 'Balance of Power' 이론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로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Balance of Power' 이론은 대충 갖다 붙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의미가 왜곡된 경우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힘'이 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함축적으로, 바로 그 '세력균형'이 국제질서의 평화를 유지해준다는 것이지요.  'Balance of Power'가 정책에 대한 용어가 되면, "어느 국가가 압도적 우월을 달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하는 정책을 의미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이나, 미·소 냉전시대 미국의 정치(70년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Balance of Power' 이론의 신봉자였지요)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겠습니다. 이런 '정의'와 '정책'이 작동하려면, 두 가지의 전제가 필요합니다.

  ① 국제정치의 구조는 무정부적 국제 시스템이다
  ② 국가는, 자신의 독립을 지고의 것으로 간주한다

  1번은, 국제정치가 국내정치처럼 정부가 구성되어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고진은『윤리 21』에서 이미 이렇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칸트의 생각으로는 법은 바로 도덕성의 실현이 어렵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제법은 그 전형이다. 국가간의 관계에서 도덕성은 가장 곤란한 문제다. 주권국가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을 갖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규제하는 법에 승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제법은 실제로는 어떤 강국의 '폭력'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그 때문에 그것은 그러한 강국의 이해관계에 종속되기 쉽다.[……](가라타니 고진『윤리 21』, 2001, 177-178쪽)

  그가 이야기한 것은 '국제법'에 대한 것이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권국가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을 갖지 않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국제 시스템은, 2번 전제를 자동적으로 요청합니다. 그것의 의미는, 국가의 '주권'이라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절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 보댕이 16세기 후반『국가론』을 통해 역설한 '군주주권'의 절대성이 베스트 팔렌 조약에 의해 국제질서의 기초로 자리잡은 것은 1648년의 일입니다. 그 뒤 '군주주권'의 개념은 '국민주권'의 개념으로 바뀌고 세부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며 불가침하다는 원칙은 국제사회에 의해 몇 번이고 확인된 바 있습니다. 어째서 국가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미국의 정치학자 Joseph Nye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주권국가의 내정에 대해서는, 비개입이라는 게 국제법의 근본규범이다. 비개입이야말로, 질서와 정의 양쪽에 관련된 극히 강력한 규범이다. 질서는, 혼란(카오스)에 일정한 제약을 가져오는 것이다. 국제적 무정부성 - 상위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 - 은, 만일 일정한 기본원칙이 준수되면, 반드시 혼란과 같은 의미인 건 아니다. 주권과 비개입이야말로 무정부적인 세계 시스템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두 원칙인 것이다. 그것과 동시에, 비개입은 정의(正義)와도 관련되어 있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사람들의 공동체 - 일정한 국가로서의 영역내에서 공통의 생활을 발전시키는 권리를 정당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외부의 사람들은, 그들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ジョセフ・ナイ『국제분쟁』, 2007, 189쪽)

  이 말은, 주권의 인정과, 그에 대한 비개입이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국가의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그것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국가'라는 것을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의 기본 단위로 봐야 하는가의 문제까지도 대두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가 그 주권을 가지고 국제정치의 중요한 행위주체(actor)로서 작동하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의 최근 저서『세계 공화국으로』에서 이렇게 논하고 있습니다.

  [……]주권국가는 타국과의 관계 없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권'이란 일국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권국가는, 타국이 주권국가가 아니라면 지배해도 좋다는 것을 함의합니다. 그것은, 유럽 밖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 주권국가는 본성적으로 팽창적인 것입니다. 주권국가의 팽창을 멈추는 것은, 다른 주권국가 뿐입니다. 혹은, 그 주권국가에 지배된 지역이 독립해서 스스로 주권국가가 되는 것의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주권국가는 필연적으로 주권국가를 불러냅니다. 이것은, 절대주의국가가 시민혁명에 의해 국민국가로 전환해도 마찬가지입니다.[……](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06쪽)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전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습니다.

  [……]리얼리즘은, 이 아나키한 구조야말로, 국제관계에 있어서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하는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왜인가. 국가를 뛰어넘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는 자국의 안전을 자력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즉,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조(自助) 또는 자력구제라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각 국가는, 스스로 군비증강을 꾀하거나,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거나 함으로써, 자국의 생존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국가는, 뭔가의 수단으로 힘을 추구하지 않으면, 자국의 정치적인 독립성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추구는 그 자체가 아무리 방위적이어도, 타국에게 있어서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다. 그 때문에 타국도,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켜려 해서, 스스로 군비를 증강하거나, 우호국과 군사동맹을 맺으려 한다. 그 결과, 쌍방의 국가 관계는 한층 적대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즉,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보하려고 해서 힘을 추구하면, 그것이 타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되고, 타국도 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하츠에 의해 지적된, "안전보장의 딜레마"라고 불리는 상황이다.[……](山田高敬・大矢根聡『글로벌 사회의 국제관계론』,2006, 28-29쪽)

  이러한 'Balance of Power' 방침에 의한 무정부적 국제질서는, "그것이 '주권', 즉 '독립'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인 바에야, 전쟁이나 민족 자결의 침해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이러한 국제질서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무정부적 국제질서 속에서 'Balance of Power'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생각이 비참한 결과로 이어지면서, 세계는 '집단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을 구상하게 됩니다.

  [……]1918년 1월, 미국은 참전 이유로써 14개조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 14번째가 가장 중요했다. 그것은 "대국(大國), 소국(小國)을 묻지 않고,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의 상호적 보장을 서로 부여하는 일을 목적으로, 명확히 규정된 협약아래, 제(諸) 국가의 전체적인 연합조직이 결성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상, 윌슨은 국제시스템을, 밸런스 오브 파워에 기반한 것에 집단안전보장에 기반한 것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다.[……](ジョセフ・ナイ『국제분쟁』, 2007, 108쪽)

  이 '집단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은, 이전까지는 국제정치상 실현되지 않았던 개념으로, '무정부적 질서' 속에서 따로 따로 행해지던 '개별 국가의 자조적(自助的) 안전보장'을 집단의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침략국이 강대한 힘을 갖고 있다면, 개개의 국가는 당해낼 수 없지요. 그러나 비침략 국가가 침략자에 맞서 결속한다면, 힘은 비침략 국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제 안전보장은 집단의 책임이 되고, 이전처럼 '중립'이나 '무임승차'를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대로, 이 '국제연맹'은 자기의 목적을 다하지 못합니다. 미국이 참가하지 않은 이상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세계는, 제 2차 대전이라는, 역사상 없었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45년 창설된 국제연합의 헌장 전문(前文)이 가장 처음 들고 있는 이념은, "우리들의 일생 동안, 두 번 다시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애를 인류에게 안겨준 전쟁의 참해로부터, 장래의 세대를 구한다"는 결의입니다. 이후는 미·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와, 냉전 종결 이후의 세계가 놓여지게 되지요. 여기까지가 제가 간략하게 살펴본 국제정치의 역사입니다.

  제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실상의 논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저는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라는 학문 안에서 positivist의 관점에 서 있는 것일테고, 이 관점을 부정한다면 post-positivist의 관점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제가 positivist의 관점이라고 해서 국가를 신봉하고 있는 건 아니고, post-positivist라고 해서 국가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닐 터입니다. 제가 확인하고 싶은 건, 지X 씨가 이야기한 "국가(nation-state)의 사고틀"을 벗어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서술한 몇 가지 전제들 -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anarchy하다, 국가의 주권은 다른 나라에 의해 지탱된다 등등 - 을 완전히 거부하신다면, 토론을 할 이유는 아마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X 씨는, 저의 전제들을 전부 부정하시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세계시민'이라는 논리를 이끌고 가는 축은 '국가'라는 사고체계이죠]라고 하신 걸 떠올린다면 말이죠. 일단 그렇다고 가정을 하고, 저의 논의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X 씨가 제기한 문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국민국가와 시민권이라는 틀이 무엇을 기반으로 지탱되는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2) 현재의 UN 중심의 '국제질서'나 '안전보장' 자체에 대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3) 인권·인도주의의 애매모호함을 고려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건 제가 멋대로 '추출'해서 '정리'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놓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런 것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번은 제가 제시한 국제정치의 관점에 따르면, 큰 문제가 없습니다. '국민국가'는 어디까지나 타국에 대해서 '국민국가'이며, 그 영역 내에서 시민권은 자리하게 됩니다. 이건 '이론'이나 '이상'의 영역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국민국가'가 현실에서 기능하는 방식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지X 씨는 페이퍼에서 이렇게 얘기하셨지요. [The identification of ‘us’ through constructing an image of the enemy shares its dynamics with the corroboration of nation-state and sovereign space through an arrangement of wars.] 정확히 그렇습니다. '국민국가'와 '시민권'은 그런 식으로 구성됩니다. 현대의 '국가'라는 개념은 분명 (냉전을 포함한) 전쟁에 의해, '적'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성된 것입니다. 이걸 재검토하자는 말은, 과연 무얼 어떻게 하자는 의미일까요.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 뿐일까요. 우리는 '국민국가'라는 것이 이데올로기와 다른 여러 가지 도구들을 이용해 자신을 성립시켜 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런 문제들을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대현의 용법을 빌리자면) 이 점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걸까요. 저는 고진의 지적대로,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만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결코 '인식'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입니다.
  2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냉전의 종결 이후, 국제질서의 핵심 축이라고 생각되는 UN에 대한 비판은 많아졌습니다. 지X 씨 역시 UN 체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요. 저는 이에 대해서, UN 체제 이외의 다른 대안을 제시하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UN체제의 문제점 역시,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알려져 왔습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문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의한 지배의 문제, 냉전의 종결 이후 증가한 새로운 형태의 분쟁(민족분쟁, 종교분쟁 등)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 등등. 이 문제들은 다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앞에서 얘기했듯이, 국제연합이 결성된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집단안전보장'에 있습니다. 지X 씨는 이런 '안전보장'의 개념이 낡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집단안전보장'은 주권국가가 존재하는 한 가장 유효하게 기능할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수단입니다. 만일 이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려면, 우리는 UN 체제의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수정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봅니다.
  UN 체제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냉전 체제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사정을 고려하는 편이 공정할 것입니다. UN 창설 이후 지금까지, UN이 행한 평화유지활동은 총 65건인데, 냉전시기(45년 이후~80년대 중반까지)에 시작된 활동은 단 12건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53건은, 모두 냉전의 종결 이후에 시작된 활동들입니다. UN의 하이레벨 위원회 보고(웁살라 대학 평화·분쟁학부와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명확히 냉전 이후(86-88년)부터 내전에 대한 UN의 평화유지·평화구축 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됩니다.(明石康,『국제연합』, 2006, 124쪽) 연간 평균 9천만명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한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 역시, 그 본격적인 활동은 냉전이 와해되던 1980년대부터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UN 체제에 대한 비판은 조금 치우쳐 있는 듯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강대국의 playground'라는 비판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익히 인식되어 온 것입니다. UN 체제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분명 현대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이상, 그에 대한 대안이 함께 제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X 씨가 페이퍼에서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인권'의 문제 역시, 그것을 재검토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X 씨는 페이퍼에서, Jennifer Hyndman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Jennifer Hyndman argues that one should distinguish human rights, human security and humanitarian intervention, claming against what she calls ‘UN humanism.’  Human security is distinguished from human rights in that the former is established not as a law meaning it is exposed to being applied selectively as shown in the case of Rwandan genocide, while the latter is elucidated in United Nations documents. Hyndman points out that ambiguities of human security lead to its operation as “imperial benevolence,” and as a common adaptation of human rights. Humanitarian law is also out-dated, considering that it was drafted right after the Second World War by a formulation of liberal states and that most recent wars are not waged between countries. Basically, a lack of clarity in the term ‘humanitarian’ raises different questions on how, when and, whether foreign intervention could be applied since “while states remain major actors and members of the UN, the balance between the legitimate power of states and individual human rights appears to be shifting.”[……]

  Hyndman이 이야기하는 문제점, 즉 human rights와 human security의 구분은, 바로 그녀가 이야기하는 'UN Humanism'의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입니다. human security 문제가, UNDP의 1994년 인간개발보고서에 의해 국제사회에 제기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주도에 의해 "인간의 안전보장(human security)에 관한 국제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인간의 안전보장 기금" 역시 마련되었습니다.(東海大学平和戦略国際研究所 編『21세기의 인간의 안전보장』,2005, 123-148쪽) Hyndman이 지적한 문제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제기된 바가 있는 것이고, 앞으로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아갈까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참고로, 이 문제도 심포지움에서 거론된 바 있습니다. 제가 글에 쓰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리고 'UN Humanism'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것이 지니는 의미 - 그러니까 우리가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무엇을 상정함으로써 생기는 의미 - 를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아래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야기입니다.

  [……]'보편적 인권'은 전 정치적이기는커녕, 본래적인 정치화의 적실한 공간을 가리킨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정치행위자가 (특정한 정체성의 담지자인) 자신과 근원적 불일치를 주장할 권리, 스스로를 사회 구조물에서 어떠한 고유한 자리도 갖지 않은 '열외자'(supernumerary)라고, 그래서 사회 자체의 보편성의 주체(agent)라고 상정할 권리다. 따라서 이 역설은 매우 엄밀한 것으로, 보편적 인권이 비인간적인 상태로 환원된 사람들의 권리가 되는 역설과 대칭을 이룬다.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구상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정치 자체를 잃어버린다. 다시 말해,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정치를 환원하고 마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창작과 비평』2006년 여름호, 379-404쪽)

  지젝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결국 '보편적인 인권'을 그냥 비판하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순간, 우리는 들고 싸울 무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제가 앞에서 지적한 점들도, 그리고 앞으로 지적할 부분도 바로 그런 인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쓴 것은, 지X 씨의 의견을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의문' 이외에 다른 걸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셔널리즘은 분명히 경계해야 하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무엇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안을 찾는 것이, 지X 씨가 지적한 국제질서 속의 '외교'가 할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 방안으로서, 가라타니 고진이 제시하는 비전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며, 또 그게 가장 가까운 미래에 달성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은,『세계 공화국으로』에서 칸트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국가에게 있어서, 다만 전쟁 밖에 없는 무법의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서는 다음 방책밖에 없다. 즉, 국가도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의)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무엇보다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는) 제민족합일국가(civitas gentium)을 형성해서, 이 국가가 결국에는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게 한다, 라는 방책 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국제법의 사고에 따라서, 이 방책을 취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고, 그런 까닭으로 일반명제로서 in thesi 올바른 것을 구체적인 적용면에서는 in hypothesi 물리치므로, 하나의 세계공화국이라는 적극적 이념 대신에(만일 모든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전쟁을 방지하고, 지속하면서 항상 확대하는 연합이라는 소극적인 대체물만이, 법을 혐오하는 호전적인 경향의 흐름을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항구적 평화를 위하여』,宇都宮芳明 역)[……](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22쪽)

  이 칸트의 이념을 바탕으로,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구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국가에 대항하면 좋을까요. 그 내부로부터 부정해 나가는 것만으로는, 국가를 지양(揚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 양도하도록 만들고, 그것에 의해 국제연합을 강화·재편성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헌법 제 9조에서 전쟁포기란, 군사적 주권을 국제연합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각국에서 이렇게 주권의 포기(放棄)가 행해지는 이외에, 제(諸)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은 없습니다.[……](柄谷行人『세계 공화국으로』,2006, 225쪽)

  국제질서에 대한 저의 견해와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을 결합했을 때, 저는 이런 고진의 생각이 가장 합리적이며 또한 효율적인 것이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X 씨가 ['동북아시아'든 '유럽연합'이든 미국을 견제하고 '자국'을 보호한다는 식의 외교는 결국 '힘'을 갖게 되면 '미국'이 하던 똑같은 짓을 또 다른 국가들에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그다지 찬성하지 않습니다. 각국이 연합체를 구성하고, 그로인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나는 것은, 결국 지X 씨가 말하는 "냉전체제 때 그려진 틀"이라는 것을 벗어나는 유효한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최장집 교수의 글입니다.

  [……]동아시아에서의 대립과 갈등의 구조가 탈냉전, 세계화와 더불어 현저하게 변했다 하더라도 한반도가 분쟁의 진앙지가 되는 한 이 대립의 구조는 다른 형태로 재생될 수밖에 없는 위험을 갖는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동아시아라는 개념으로 이 지역을 지칭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냉전시기 동아시아라는 말은 이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이 지역의 공동관심사와 이해관계, 공동의 목표, 그리고 공동의 이상을 표현하기 때문에 이 말은 냉전시기의 대립구조를 완전히 허물어 버린다는 의미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즉 그것은 이 지역을 분할했던 냉전시기의 대립구조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곧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 지역의 평화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동아시아라는 말은 두 가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냉전으로 분할된 지역임을 부정하고, 어떤 것을 공유하는 지역이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패권국가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그 필요에 따라 외부로부터 부여한 명칭이 아니라, 이 지역 국가들 스스로가 갖는 내적 요구와 필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라는 지역의 범주를 호명해냄으로써 우리는 무엇에 대항하는 안보가 아니라 스스로의 평화를 만들기 위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최장집「동아시아 공동체의 이념적 기초 - 공존과 평화를 위한 공동의 의미지평」,『아세아연구 통권 118호』,2004, 98-99쪽)

  이 정도로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무엇에 속고 있었냐를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현실적인 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하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칸트의 말도, 아마 그런 맥락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포스트'가 붙은 모든 이론과 개념들이 가져다 준 '의심'과 '재검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현실을 바꿀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 이건 사족이지만, 지X 씨는 제 답글이 꽤나 날선 것처럼 느끼셨나 봅니다. 확실히 저는, 이전의 답글에 비해 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지X 씨의 답글이 '불성실'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 시인의 말을 좀 빌리자면, 저는 이상주의적이든 교조주의적이든, 그 어떤 주장이든지간에 성실하기만 하다면 저 역시 성실하게 답글을 달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성실한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성실하게 답변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타인의 오해나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너무 지나칠 정도로 참을성이 없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글을 쓰는 대부분의 경우는, 제가 그 사람의 주장이 불성실하다고 판단했을 때입니다. 그 이외에는, 그리 지나칠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기억이 없군요. 이건 아마 성격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전에 지X 씨가 했던 말대로, 공부를 "하는 방법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님 공부 자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고 있던가."

  * 인용의 출전 중, 한자나 일본어로 저자의 이름이 적힌 저작들은 모두 일본어 서적입니다. 제가 번역해서 썼기 때문에, 오역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이 시대에 상대주의는 보편화되어 있다. 문화인류학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이 관점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차이가 곧바로 우열이나 도덕적 판단으로 전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가릴 것 없이 스며들어, 이제는 하나의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는 사회 각 분야의 상대성 열풍이 나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가장 저질의 상대성은, 예로 들자면 인터넷의 토론(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싸움)같은 것이다. 세상 만사 상대적인 것이니, 너도 옳고 나도 옳고, 결국 그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결론이 나는 게 바로 그렇다. 양비양시론처럼 어떤 근거나 논리조차 내세우지 않는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 결국 모든 게 옳다는 단순한 판단. 이것은 내 죄책감이나 책임을 덜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떤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규준이 되는 가치는 애초에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의 말대로,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치판단을 할 때 필요한 규범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자기요청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굳어지면 공동체의 규범이 되고 격률이 되고 성문법이 된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꼭 필요한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아무런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기존에 사회를 얽매었던 다양한 관습과 굴레들을 벗어버리는 것은 이 문제와 별개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판단은 뗄레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행동을 행동 그 자체로만 보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행동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로 인해 '무언가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살인의 경우. 이때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우리는 한 인간이 사회에서 소멸된 사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때 강요된 관습과 도덕률에 얽매이는 것은 거부해야 할지 모르나, 나 자신의 판단 근거까지 없어질 수는 없다. 그것이 칸트가 말한 '내 마음의 도덕률'의 참된 의미이다. 그는 습속을 내면화하라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판단 기준을 세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은 칸트 철학에서 정언명법으로 표현된다.
  이런 당연한 명제에서 출발해, 나는 지젝을 지지한다. 그가 스탈린을 말하는 것은 그저 농담이 아니다. 그는 분명히 어떤 '사회적 기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감히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포스트 모던과 가치 붕괴가 심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가 가치판단을 하기 위한 기준이다. 지젝의 예를 빌리면, '자율적인 포스트 모던 아버지'와 '엄격한 근대적 아버지'이다. 그리고 아이가 훨씬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이다. 물론 이런 예는 지젝의 발언을 그 맥락에서 살펴야 오해없이 이해될 수 있겠지만.
  어떤 일이든 시작될 때의 의도와 목표를 끝까지 지켜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사라지거나, 목표를 달성한 뒤 과대 팽창한다. 현대의 가치 붕괴는 후자에 가깝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했는데, 이 시대는 그것의 별로 좋지 않는 변형으로 되어가고 있다. 근대의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푸코를 필두로 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기했던 문제의식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무의미한 논의로 바뀐 '가치판단에 대한 회의'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정말 모든 것에 대한 판단기준이 없을 때 벌어질 일들을, 그들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인가.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모두 나쁘다고 말할 때,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에 반대하는 세력도 모두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가.

0. 이 글을 쓰는 이유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어찌보면 하찮은 일이다. 나는 내 삶을 결정하기 전에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언제 죽을지 결정하지도 못하고 죽는다. 그 두 가지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고정된 두 개의 점과 같다.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이 생과 사의 문제에 집착했지만, 사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게 아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이미 결정된 사실이라면, 나에게 -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리라.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입을 연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나마 입을 연 사람들조차 모두 추상적이거나 현실지상주의적이어서, 숲을 보거나 이끼를 보는 두 가지 방향만 있을 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무를 더듬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런 경향은 양 극단을 이루었는데, 그 하나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는 막연한 충고이고 다른 하나는 철 좀 들라는 체념 섞인 협박이다. 이 상황은 이 시대의 청년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내가 그런 삶의 방식을 찾고 추구하려 하면, 그 자리에 꼼짝말고 서 있으라는 협박이 들려온다. 그 협박에 굴복하고 서 있으면, 날아오를 꿈조차 잃어버린 형편없는 세대라는 목소리가 다시금 '똑같은 방향'에서 들려온다.
  우리 청년들이 그 비좁은 길 사이에 묶여 있는 것은 예속일 수밖에 없으며, 인생을 온전히 사는 것은 요원한 꿈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우리는 과연 무엇이 인생을 온전하게 사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일반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시대에서만 써먹을 수 있는 생존기술도 아니다. 나는 그 두 가지가 하나로 통합된 온전한 지도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시대라는 숲에서 그저 살아남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에 이 시대와는 동떨어져서 완벽한 이념을 추구하고 싶지도 않다. 전자는 삶이 허무해지기에, 후자는 이 시대에 이미 불가능해진 이야기일 뿐더러 현실에 적용할 수 없기에 거부한다. 나는 이 시대를 온전히 살아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삶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은 청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실질적인 한 권의 핸드북일 뿐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런 소박한 젊은이의 요구에 불응한다. 시대의 강요와 침묵,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상황, 이 처지가 내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밖에 없다.



1. 정답은 없다

해답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

- 거트루드 스타인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하기에 앞서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이 질문은 '어떻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어떤 삶의 방식이 정답인가'라는 명제로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인생에 있어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가 역사를 만든 이래로 수 천년 동안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삶의 정답이 무엇인가를 추구했지만, 그 누구도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발견될 리가 없다. 내가 이렇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왜 태어났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어떻게 될 지 안다면, 그 '사후의 삶'에 맞춰진 삶이 정답일 것이다. 중세의 사람들이 좋은 예인데, 그들에게는 '삶의 모범답안' 쯤 되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다. 그들에게 사후세계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사후의 영생을 위한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삶이 올바른 것인가'를 따질 필요가 없었다. 그런 시절은 지나갔고, 우리는 사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현대 과학은 생명 탄생의 최전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밝혀낸다 해도 '왜 태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아마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독실한 개신교인들은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생의 정답 또한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은 하나님에게 의탁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적합한 의미의 '정답'이 아니다.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조차 모호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도덕이나 윤리 등의 기존 가치가 이전의 그 어느 시대에 비할 수 없이 무의미해져 있고, 그렇다고 새로운 가치판단의 기준을 확립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대는, 그런 기존의 가치들 - 종교, 도덕, 윤리, 정의, 가족 등 - 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이다. 


1-1.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이런 상황을 내가 비판하면 젊은이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은 결국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런 질문으로 알 수 있다.[……]

- 요로 다케시,『생각의 벽』중에서


  정답은 없다. 여기에 뒤따라 오는 질문은 이 시대에 거의 동일한데, 그것은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의 형식을 갖춘다. 답이 없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이 질문이 던져짐으로서, 내가 지금까지 행한 추론은 무책임한 것이 되고 만다. 답도 없는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모적인 논의에 그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대해 반성하고 있는가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오히려 그렇게 해답을 요구하는 상황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묻는 심리, 바로 그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런 심리 이면에는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문제가 깔려 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거나, 또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어찌되었든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어쩌라는 건데?"
  요로 다케시의 말대로, 이것은 현대의 상식이 되어 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상대방을 논파하는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또는 상대방과 함께 생각해 나아가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이 시대에 들어서 여러 모로 드물어진 미덕이다. 현대에 요구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한 빠르고도 신속한 대답이다. 네이버 지식인이 괜히 뜬 게 아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빠르고도 신속한 대답이 나온다.
  문제는, '삶의 의미'라든가 '인생의 정답' 같은 것은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을 때 별로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생활 상식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 외의 많은 질문들은 보통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지 않는다. 그리고 물어봐도, 정답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100%확신할 수 있다. '노동과 자유의 문제', '인생의 의미' 같은 건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봐도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저러저러하게 하면 된다는 간단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 시대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런 질문에 청년들은 당황한다. 객관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유일한 교육방식이었던 우리들은, 이런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시대는 이런 '답 없는 질문'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질문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그 질문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소리가 또다시 들려올 것만 같다."(요로 다케시,『생각의 벽』) 정답은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어쩌면 좋다는 것인가? 이런 반사적인 반응이 나에게 되돌아올 것만 같다.


1-2. 그대 손으로

  천천히 생각해보자. 정답이 없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정해진 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무엇이든 답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인생에 정답이 없다'라는 말은 '각자의 인생이 각자에게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기만인 '인생에 정답은 없어. 너희가 살고 싶은대로 살면 되는거야'(이 말이 기만인 이유는, 이 명제의 진리치가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명제의 화자 - 선생으로 대표되는 - 가 명제를 실천적으로 증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명제와 동일하다.
  결국 정답이 없는 인생에서는, 정답은 각자 만들어 가지는 수밖에 없다. 아주 간단하고 쉽다. 자신이 옳다고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신념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살면 된다. 그리고 그건 굳이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도 된다. '나는 서른 전까지 10억을 모으겠다'는 신념도 좋고, '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소박한 행복을 느끼며 살겠다'는 신념도 좋다. 그렇게 하나 만들어 가지면, 그게 그 사람의 인생에서는 정답이 되는 것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드시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무엇이든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세대 밑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게 내면화된 경향이 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에는 강하지만, 답이 없는 문제일 경우에는 그 상황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회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전적으로 우리 세대의 책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 세대는 물론이고 한 인간의 경우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후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로 다케시의 말을 들어보자.

[……]정답은 없다.
  그러면 정답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끈기를 가지고 계속 생각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당신이 만약 이 문제의 정답을 곧 찾아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인생은 길다.
  남이 가르쳐준 정답으로 살아갈 만큼 인생은 달콤하지 않다. 스스로 터득한 정답은 틀렸으면 바로 잡을 수 있다.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정답에 가까운 방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남이 가르쳐준 정답을 믿다가 그것이 틀린 경우, 남만 탓하는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 깨우치는 일이란 별로 없을 것이다.
  인생은 절벽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 손을 놓으면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 올라가기에는 너무나 지쳐 있다. 더 오를 여력이 없는데도 올라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없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답을 요구하거나 원치 않는 답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본래 개인의 삶에서 축적된 경험을 통해 개인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진정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 - 기성 세대 또는 사회구조의 핵심 - 이 말하는 것을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것,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의 진실과 거짓이다. 양면이다. 어느 한쪽 면이 아니라 두 면을 모두 보고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필요하다. 어느 구덩이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구출될 가능성은 우리에게 전무하다.



2. 추론의 시작

  이제 주된 논의의 기반은 성립되었다. 남은 것은 실제로 추론하는 것 뿐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원칙을 세우려 한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나는 우리가 실제로 문제삼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저 천상에 이데아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나 우리가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당장 저녁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앞의 두 가지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만일 해결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마지막 문제에 비해 현저히 적다.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갈 것이냐라는 문제에 비하면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나는 다른 문제의식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두지 않고서는 다른 문제가 그 의미를 잃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일, 이것은 그 이후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중요할 수밖에 없다. 먼저 방향을 잡고 나서야,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해 올바른 - 그러니까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에 적합한 -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시대를 헤쳐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무기를 손에 쥐고 싶은 것이다. 당장 하늘의 별을 따러 올라가기 전에, 내 발 밑에 있는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것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내 추론을 이끌어가려 한다. 하나는 이 시대에 너무나도 널리 퍼져 있는 체념조의 협박이다. 다른 하나는 그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외치는 비교적 성숙한 충고이다. 나는 이 두 갈래의 길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과 이면에 숨겨진 허구를 말하고 싶다. 그 뒤에서야,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A. 협박의 문제

  협박은 상대방에게 겁을 준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협박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힘은 그것이 상대방에게 있어서 '해결 불가능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작동한다. 모든 협박의 구조가 그렇다.
  테러리즘은 이 협박을 상당한 경지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이들이 택하는 보편적인 방법이 바로 '인질'이다. 그들은 인질을 잡은 뒤에 상대방을 협박하는데, 그 경우 항상 강조하는 것은 이 과정이 멈출 수 없다는 점(해결 불가능하다는 것)과 인질의 사망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손해의 감수)이다. 그리고 이들이 목적을 달성할 확률에 관계없이, 그들의 의지는 매우 충격적이고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전달의 효과는 인질이 한 명씩 죽어나갈 때마다 배가된다.


1) 협박의 작동방식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치는 첫번째 문제가 바로 그 '협박'의 문제이다. 이 시대는 묵묵히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협박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협박은 처음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시험' 또는 '경쟁체제'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 협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게 된다.
  이 '경쟁체제'의 주입이 완벽하게 내재화되고 나면, 사회는 다른 형태로 압박을 가하는데 그것은 흔히 '먹고 사는 문제'로 표현된다. 자본주의 사회체제 내에서 학생 신분을 막 벗어난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사회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그 협박의 주요 무기는, 소비에 길들여진 우리가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지 않고서는 우리가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없고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다는 그런 두려움이다. 평소에 자립심의 향상과는 거리가 먼 교육을 받아온 세대로서는 당해내기 어려운 협박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심리상태로 인해 더욱 심해진다. 다른 이들이 먹고 사는 것과 내가 먹고 사는 것의 차이를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정말로 필요한 것을 그에 알맞는 화폐를 내고 구입하는 교환가치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비싼 것을 구입하고 다른 이에 비해 좀 더 튀어보이는 것을 구입하는 식의 '차이의 가치'에 기반한 사회라는 것도 한 몫을 한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정말로 우리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가 욕망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원하고,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기호의(더 나은 화폐가치의) 상품을 원한다. 그런 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구매할 능력이 없는 ' 삶은 굉장히 불행한 삶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협박의 가장 큰 힘은, 그것을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생겨난다. 우리 세대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져가는 시점에서 태어났고, 그것의 존재가 철저히 부정당하는 과정 속에서 자라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굉장히 희박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이미 시도해 볼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좌절하도록 규정지어진 것이다.
  그건 단지 맑스적인 사회의 구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세계 유일의 강대국을 등에 업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어떠한 변화의 움직임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회운동 역시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사회체제 - 자본주의라는 기본적인 경제 틀 - 을 부정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이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도록!”라는 지젝의 조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칼 포퍼의 발언, 그러니까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바보다. 그리고 30대에 아직도 공산주의자인 사람 역시 바보다"라는 비꼼은 바로 이런 협박의 지식인적 변용에 불과하다. 그 주장 - 협박 - 의 핵심은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구조의 문제'나 '사회 경제의 문제'처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의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물리적인 힘인 것이다. 진중권의 말을 들어보자.

[……]푸코의 말대로 권력은 도처에 있다. 정말 중요한 권력은 바로 우리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 관계의 망이다. 진짜 억압은 여의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오는 것이다. 악마는 한나라당도 아니고, 열린우리당도 아니다. 조선일보도 아니고 오마이뉴스도 아니다.
  악마적인 것은 자기를 둘러싼 인간 관계, 다시 말해 당신의 친구들과 나아가 당신 자신이다. 권력은 수많은 거미줄로 인간의 몸을 얽어매어 충성을 강요한다. 사람들은 권력에 충성함으로써 그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바로 '노예의 도덕'이다.[……]

  권력이란, 그러니까 사회구조의 강요와 협박이란 안기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전경련에서 오지도 않는다.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오지도 않고 경영대학 학과장에게서 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넌 커서 뭐해 먹고 살래?"라는 한숨섞인 발언을 할 때 작동하는 것이다. 같은 학과 동기 녀석이 인턴 과정을 밟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자신의 연봉을 자랑할 때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 충분히 젖어든 내 의식이 자기 신세를 한탄할 때 작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협박과정은 매우 세련되고 현실적이며, 절대 추상적인 이념이나 사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이 변경 불가능한 하나의 환경이라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철저히 순응하는 것만이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는 첩경이라 믿는다. 이 시대는 그런 '노예의 도덕'이 매우 구체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 논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하게 작동하며, 단순히 모든 이에게 통하는 일반론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각자의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설정에 기반하여 움직인다. 이로써 우리는 이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제시하는 가치에 복무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고, 심지어는 방법론 이상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고까지 믿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공병호인데, 그는 신자유주의 광풍이 태풍이나 지진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협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또 실제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2) 협박의 허구성

  그런데 이 협박은 그 자신의 속성을 전부 솔직하게 드러내놓지 않기 때문에 사기에 가까운 것이다. 이 협박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방식은 매우 부르주아적인데, 그것은 '성실한 노동을 통해 행복한 중산층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매우 소박하고 아름다운 말을 구호로 삼는다. 땀 흘려 일하고 그 대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막 사회에 발을 내딛거나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이 발언은 굉장히 큰 효과를 가진다. 앞에서 서술한 '변화 불가능성'의 벽에 부딪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없다. 그냥 이 선택이 실제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는 보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철들기'의 메커니즘이다. 한 청년이 사회에 대한 의심과 반항을 그만두고 그 구조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할 때 이 '철들기'의 과정은 완성된다.
  이 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우리는 이후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순진하게 믿었던 자본주의의 환상 -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벌고 또 그 능력만큼 삶을 영위한다는 - 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깨닫게 되는데, 이 지점을 말해주지 않기에 '철들기'의 과정은 사기다. 보험 약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고 터무니없는 계약을 체결시키는 보험 설계사와 마찬가지로 저질인 것이다. 더구나 사회는 이 '철들기'라는 보험계약을 태어나서부터 사회에 발을 내딛기까지 20여년이라는 시간동안 제도권 교육과 매스컴의 영향력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기에 우리가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악랄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보험계약'의 이면에 감춰진 허구성을 좀 명확히 파악하고 나서 계약을 하든 말든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계약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가 '자본주의 체제 말고 대안이 있어? 그게 올바른 거라고."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그들 중에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들이 정말로 자본주의에 대해 속속들이 다 파악한 뒤에 그런 주장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전 뒤에 숨어 있는 면들을 보지 않거나 볼 필요가 없기에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큼 대가를 받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을 선전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A라는 기업에서 일하던 40대의 ㅎ과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울고 있다. 그의 푸념을 들어보자.
  "내가 이 회사에 몸바쳐 일한 게 얼만데, 날 이런 식으로 버려? 내 청춘을 바친 회사를…"
  진정으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푸념을 늘어놓아서는 곤란하다. 본래 자본주의가 그렇다. 기업은 그 사람이 회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상관없이, 그의 노동이 그가 받는 보수보다 가치없을 경우에는 아무 미련없이 해고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래 작동방식이다. 그러므로 진짜로 자본주의를 신뢰하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해고되었을 경우에 절대 저런 푸념을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이런 것이다. 회사의 매출액이 줄고 당기순이익이 떨어졌을 경우에 스스로 연봉을 깎는 것이다. 경영이 악화됐을 때는 스스로 퇴직하는 것도 좋다. 그것이 자본주의적 인간에게 적합한 행동방식이다. 회사의 이익이 늘었다고 월급을 올려달라는 주장은 자본주의적 인간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의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최소화하고 회사의 생산시설이나 제품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이윤의 운영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백혈병 걸린 환자가 있다. 위험한 상황이지만 골수이식을 하면 나을 수 있다. 적합한 대상자도 있다. 그런데 수술비가 없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줄 수가 없다고 한다. 환자의 어머니가 울부짖는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사람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이런 절규도 좀 곤란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료 역시 상품이기 때문이다. 해당 치료에 상응하는 교환가치(화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품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절대 저런 식으로 절규해서는 안된다. 아, 그래, 내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라면서 유연하게 물러나주면 된다. 환자의 목숨은?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은 그것에 해당하는 교환가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자본주의는 화폐로 교환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걸로 친다. 심지어는 예술도 교환가치로 평가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 목숨'은 해당하는 교환가치가 없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준다고(즉, 목숨을 구해준다고) 갑자기 교환가치가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일 한다고 돈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일상적 표현이다.
  그 외에도 우리가 미처 약관에서 발견하지 못한 채 계약에 사인하게 되는 것들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교육도 상품이고(대학 등록금을 생각해보라), 심지어는 사람도(명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특정한 부분 - 외모나 기존의 자본 등등) 상품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인간은 "넌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니?"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교환가치가 실생활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3) 보완책 : 그것의 허구성

  이런 방식의 발언에는 언제나 반론이 존재한다. 그것은 "나의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아!"라고 외치는 부류와, "자본주의의 보완책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그것이 경제학적으로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말한다. 그들이 주로 내세우는 논거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화폐자본에 집착하는 변태적인 체제가 아니라 합리적 개인이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은 애덤 스미스를 많이 닮아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된 과정 자체를 정당화의 근거로 삼는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립되었기 때문에, 성립된 구조물 역시 자연스럽게 인정받는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는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구조적 모순이 '자본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런 주장의 허구성은 더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발점을 산업혁명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대략 20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이 주장이 현실에 반영된 지점은 세계 속에 단 한 곳도 없었다. 자본주의가 그 뿌리뽑을 수 없는 불치의 구조적 문제점들을 깨달은 것은 대부분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통해서였으며, 자본주의가 벌여놓은 수많은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온 것 역시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한 보완책이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내재된 결함으로 인해 자살 직전의 처지에 몰렸을 때(1929년의 대공황), 그 목숨은 자본주의의 완성에 한 걸음 가까이 전진함으로써가 아니라 뒤로 후퇴함으로써(케인즈 경제학)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다 실질적인 문제로, 그들의 주장은 현실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별 쓸모가 없다. 현실적으로 자본은 신격화를 넘어 하나의 신으로 이미 기능하고 있으며, 그것이 숭배되는 구조는 매우 체계적이어서 별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완성 -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에 다가갈수록, 그 신격화의 구조는 고착화될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자본주의에 문제점이 있지만, 그걸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예로 드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역기능을 순화시켜주고 보완하여 살기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가 사회시간에 지겹도록 들은 말이 우리나라의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이며 정치는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이다.
  이 언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정치체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구조는 어디까지나 생산체계의 구조에 따라 규정되는데, 그것은 정치체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굳이 유물론적인 관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구조가 정치판을 결정짓는다는 데 특별한 논증이 과연 필요할까?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라기보다 한쪽에 의해 다른 한쪽이 규정되는 수직적 구조라고 하는 편이 옳다. 민주주의의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선거인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도 선거가 자본의 움직임과 아무런 관계가 없이 공정하게 치뤄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는 민주주의적 절차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선택되는 인물은 민주주의의 이념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자본을 굳게 지켜나갈 수 있는 인물이다. 그 관계망은 매우 교묘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언설 역시 자본주의의 선전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도, 이런 이중적인 구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없기에 이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그런 주장을 믿음으로써 가질 수 있는 것은 헛된 희망과 영원히 고착될 수밖에 없는 삶의 양상이다. 우리의 삶은 민주주의의 발달로 조금 더 나아졌을지 모르나, 그것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부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양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4) 요구되는 자세

  그럼 어쩌라는 건가? 이런 질문이 다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순응하라는 협박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완전히 적응하라는 '철들기'의 메커니즘이 허구성을 숨기고 있는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게 현실이고,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모두 이전의 위대한 학자들이 지적했던 것들이고, 그 역사는 짧지 않다. 그리고 그 지적으로 인해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이것이 어쩌면 정말로 고착화 되어가는 하나의 환경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본주의라는 환경이 하나의 파도처럼 덮쳐오는 상황에서, 그 파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보드 서핑'의 문제일 뿐이다. 그 파도를 어떻게 하면 잠잠하게 만들고 육지로 바꿀 수 있는가는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물론 나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으므로 뒤집어 엎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발언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현실적인 방안을 갖추지 못하고 허언(虛言)이 되고 말기에 무의미하다. 나에게는 대안이 없다. 나는 자본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인간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이대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방식 말고 당장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양 극단의 딜레마,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언제나 현재 존재하고 있는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이 자유롭지 못한 선택지(지젝). 그것은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함부로 이 체제가 완벽하고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문제점을 쉽게 망각하지 말고 이 구조에 대한 의심을 한시라도 풀지 말라는 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대가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대는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에게는 의료도 교육도, 심지어는 사랑조차 상품이 되어야 한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런 구조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끝까지 '이 체제가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라는 단정은 내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의 그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이고 강력한 요구와 협박 속에서 그들이 내민 '비자유의 선택지'에 사인을 하기 전에,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감추고 있고 무엇을 속이고 있는가를 두 눈 똑똑히 뜨고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하고, '철들기'의 불합리한 메커니즘에 익숙해져 점차 무감각해져 갈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 당장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하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바꿀 수 있다. 그 믿음은 실현 가능성을 가지기에 희망적이지만, 당장 전선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기에 절망적이다… (운다.)


B. 그럴듯한 충고의 문제

  앞에서 나는 이 시대가 내놓는 두 개의 길 중 매우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았다.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우리에게 제시되는 조건 자체를 전적으로 승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조건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건의 긍정적인 면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도 아무 거부 없이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이건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다.
  이로써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의 추론은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으나 그 허구성으로 인해 우리를 똑같이 절망시키는 문제, '그럴듯한 충고'의 문제다.


1) 충고와 그 수용의 양상

  내가 추론의 전제로 삼은 것은, 우리의 삶에 정답이 없으므로 스스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명제였다. '협박'의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를 끝낸 상태의 인간은 대부분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구조에 대해서 의심하고 어느 정도는 거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면 그 '방향성'을 설정한 후에는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하는가? 인생에서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부딪친 청년들이 흔히 듣게 되는 말은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따끔한 훈계' 쯤으로 포장되는 일련의 그럴듯한 충고들이다. 김형태의『너 외롭구나』같은 종류의 책이 대표적인데, 이 충고의 기본적인 방향은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없다', '너희 세대는 나약하고 패배주의에 빠진 세대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 문제가 시대를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심히 우려하면서, 그들이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갖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라고 채찍질한다. 이들의 기본적인 발상과 태도는 매우 긍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 우리 세대를 (속으로는 어찌되었건 겉으로는) 걱정하고 있으며, 우리 세대가 정말로 자기만의 꿈을 찾고 그것을 향해서 몰두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시대가 전반적으로 '침묵과 강요'의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충고를 들은 청년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기 마련이다. 그래, 나는 지금까지 꿈과 희망 같은 걸 잊고 살았어! 사회가 규정한 대로 살아왔던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순간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만의 해답을 찾기에 골몰한다. 꿈과 희망, 꿈과 희망… 원대한 포부, 앞을 향해 나아갈 나의 커다란 목표! 그것을 설정하기 위해 애쓴다. 괜히 무언가 큰 문제 하나가 해결된 듯한 느낌이 들고, 동시에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그런데 그 '꿈과 목표'라는 게 쉽게 정해지지 않는다. '자기만의 신념'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하면 된다는 데, 그게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다. 또한 정해진다 해도 그것을 밀고 나가는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째서일까? 이 아름답고 진실한 충고가 어째서 우리 삶에 진정으로 반영되지 않는 것일까?


2) 땔감의 문제

  이 시대의 청년들이 감동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변화할 몇 안 되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이 '충고'는, 그 자체로 굉장히 유용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가에 있다.
  '충고'의 핵심은 청년들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불씨'를 지피는 데 있다. 특별히 인생의 목표나 방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라왔던 청년들에게 '무엇이든 원하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고 불을 지르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보편적으로 자신을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불지름'에 쉽게 반응한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과정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다. 스스로의 목표와 의지가 확고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목표와 의지를 '어떻게 하면' 확고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회피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불은 한 번 붙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이지만, 땔감이 없으면 금방 꺼져버린다. 그럴듯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깨달음을 얻어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겠다고 희망에 차 있던 청년들이 금세 지치고 풀이 죽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땔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건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무엇이든 확실히 목표를 잡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충고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청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과연 언제까지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듯 하다. 확신하면서 말할 수 있는데(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나라 대학 신입생들의 99%는 자기자신에 대해서보다 자신의 성적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즉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고 어느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전무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그럴듯한 충고를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고 현실적인 성과를 이뤄낼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입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온 인간이,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장단점과 능력을 파악하고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3) 만족의 문제, 고민의 문제

  만일 운좋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어 그 목표를 향해 한 발짝 내딛었다고 치자. 여기서 그는 또다른 문제에 부딪친다. 그것은 '만족의 문제'이다. 찾아낸 목표를 '미래의 금전적 결과'와 결부지어 자신의 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협박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미리부터 '만족도'를 따지는 배경에는 대부분의 경우 표리부동한 자세라는 문제가 있는 듯 하다. 돈을 버는 것과 자신의 꿈을 일치시켜야 하지만 일치되지 않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돈도 많이 벌고 꿈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당장 고민해보면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나름대로 돈 되는 쪽으로 진로를 잡자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 마음에 걸린다. 미래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무엇을 놓고(꿈을 포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울질하면서 과연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확장형이 바로 '고민의 문제'다. 하고 싶은 일도 찾았고 그게 정말로 의미 있으리라는 것도 알겠는데, 내 삶을 가로막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집이 가난하면 돈이 없어서, 집이 부유하면 그것이 내가 살고 싶은 방식에 어긋나기에 문제가 된다. 나는 삶을 정말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올바르게 살고 싶은데, 세상 모든 것들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절망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청년들은 대부분 스스로 온갖 변명을 미리 만들어 놓고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조차 있다. 내 꿈은 크고 원대한데, 사정과 상황이 뒷받침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 모양이라는 식으로 그 괴리로 인한 정체를 '비극'으로 승화시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타인이 자신의 주장을 인정해주기만을 바란다. 정작 그 상황이 변화되는 일은 원치 않는 것이다.


4) 요구되는 자세

  이 딱한 처지 속에서도 나는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땔감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교육환경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 것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 갑자기 패배적이고 나약한 인간이 출생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라온 환경과 주입된 교육이 우리를 그런 상황에 이르도록 만든 것이다. 다섯 가지의 보기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에 인생을 걸어온 인간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깨닫고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땔감'이라는 것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가 받아서 몸에 내재된 교육의 결과를 탓한다 한들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지를 지속시킬 수 있는 '땔감'을 찾아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지속될 수 있도록 불을 지펴야만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우리가 받았던 방식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하다.

  만족의 문제는 결국 앞에서 말한 '협박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시대가 제시한 기준에 충족되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건 또한 '땔감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시대의 기준이 올바른 것이라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학교에서 그런 식의 교육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으나, 사회 전체가 우리 세대에게 실질적으로 교육시켜온 것은 시대가 제시하는 기준이 가장 올바르고 편안한 것이라는 하나의 '이념에 기반한 사실'이었다.
  이로써 두 가지 방법이 도출되는데, 하나는 '만족'의 기준을 사회의 기준과 일치시키지 않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옛날 그리스에서는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니 꺼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무엄한 노인을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은 디오게네스가 진정으로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디오게네스의 삶은 그가 그의 삶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자신의 통나무가 비좁다고 느꼈다거나, 좀 더 크고 호화로운 통나무에서 살기를 바랐다거나, 알렉산더 대왕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부러움을 느꼈다면 그 일화의 내용은 상당부분 달라졌을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걸 알자마자 넙죽 엎드렸을 것이고, 알렉산더 대왕은 단칼에 그의 목을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시대가 제시한 기준을 거부하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내가 내 삶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금전적 가치'는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건 보통 사람들이 간단히 취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디오게네스나 싯다르타 정도는 되어야 실천가능한 것이니까 말이다. 다만 이 시대가 제시하는 기준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라는 주관만 있으면, 어느 정도는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두 번째 방법은 '표리부동한 자세'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상하게도 돈이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면서,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놓는 것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와 '꿈'이라는 정신적 목표 사이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갈라놓고, '돈'을 지향하는 삶은 천박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사회의 보편적 성향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정말로 '돈'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을 '속으로는' 바라며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인다. 굉장히 분열적인 자세다. 이런 자세는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도 악영향만을 끼친다.
  실질적으로 '돈'이라는 가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을 감안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 가치가 자신이 원하는 것과 떨어진 위치에 있다면 최대한 근접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순서다. 둘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놓고 무엇을 택할까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일이라면 '돈'을 택한다 한들 그 일을 포기했다는 후회가 오랫동안 남을 것이며, 정말로 원하는 일을 한다고 한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돈'을 아예 배제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둘을 현실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고민의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다. 그런 인간들의 경우 대부분은 현재의 상황이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런 '변화시킬 수 없거나 어차피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무의미한 고민'이 정말로 내 앞을 막고 있다는 환상을 스스로 깨지 않는 한, 삶은 언제까지나 그 모양 그대로이리라는 사실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런 말을 했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은 강물 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인간이 고민하는 내용은 대부분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나 이미 일어난 일, 또는 고민한다 해서 바꿀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말로 고민할 가치가 있는 것은 4%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결국 스스로의 인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옮길 수 없는 강물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강물에 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3. 실천의 문제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았다.[……]

-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중에서


  이제 내 추론의 주된 논의는 끝났다. 긴 글을 여기까지 읽어 온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의아해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글 속에서 실제로 대책이나 방안에 대해 제시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구조에 대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며, 우리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여러 조건들 - 교육의 문제,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의 문제, 만족의 문제 등 - 에 대해서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벗어나 걱정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말하지도 못했다. 결국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가 이 글에서 진행해 온 추론의 의도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마주치는 문제를 좀 더 명확히 보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신경쓰고 붙잡아 씨름해야 할 문제들 이외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마모시키고 소모해 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줄 열쇠가 아니라 우리가 어느 문을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다. 어느 방에 갖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 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전무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어볼 사람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실천적인 방안을 기대했는데, 그건 어디에 있는가?'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경향은 매우 심화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추론 - 그러니까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 이 무의미하게 받아들여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내 추론이, 어떤 철학이 내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기에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잘못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상이나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개개인의 삶이 각자에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희의 삶과 내 삶은 분명 다르다. 그리고 그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이런 식의 추론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나 사상을 하늘에 떠 있는 별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적용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은 전체상을 개괄해줄 뿐이고, 응용은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 삶에 있어서 실천적인 방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의 구원은 자기 구원이다. 그의 구원은 자기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각자가 자신의 삶에 적합한 방안을 실천적으로 찾아야 한다면, 나의 이런 추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첫째로 변화의 지점을 자기 자신이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고, 둘째는 우리들이 모두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변화의 지점을 지적해가며 발전해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큰 소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말을 했다.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구원해야 한다. 이 시대의 누구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