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이런 글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장기전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보다 길고 정리된 글을 쓰려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것들만으로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글로 풀어내기가 불가능했다. 그것은 보다 깊은 공부와 폭넓은 시야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한, 미완의 과제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당장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발신하는 것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글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일본에 오기 직전까지 내가 했던 일은, 바로 '자본론 강독'이었다. 7월 중순까지 친구들과 '자본'을 읽은 나는, 그 뒤 한 달여 동안 유학 준비를 했고, 8월 27일에 이곳 일본에 도착했다.
  처음 도착해서 겪은 여러가지 에피소드나,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거나, 그 나라의 '외면'에 불과한 것들로, 진정 '외국'으로서의 차이를 느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차선이 반대라든가, 거리가 깨끗하다든가, 사람들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든가, 한국 화폐는 일본에서 환전이 안된다든가 - 이런 일들은 그냥 2박 3일 정도의 여행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이야기다. 토크빌이 증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야 했던 시절과는 달리 겨우 2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면 올 수 있는 이 나라에 대한 인상비평은, 굳이 내가 덧붙이지 않더라도 이미 산 같이 쌓여 있고, 내가 한 두 줄 덧붙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곳에 도착해서 일상에 대해 거의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건 바로 그런 내 고지식함에서 온다.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한 것은, '일본인론'으로 요약되는 수많은 저작들 - '국화와 칼', '아마에의 구조', '다테 사회' 등등 - 이 어떤 심원한 고찰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다. 일본인과의 생활은, 수많은 '일본인론'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나에게 전해주었다. 이들은 정말로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것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혼란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다테마에'라는 것을 '거짓말'과 동일한 것으로 인지하지 않으며, 그것 역시 '혼네'와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 믿는다. 이런 것들이 아무 여과장치 없이 다가왔기 때문에, '일본인론'이 일종의 과장된 '상상'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일종의 충격이었다.

  내가 '타자'로서의 외국인에 대해 강력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웃기게도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에게서 왔다. 나는 내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이곳에서도 토론을 하고 싶어했는데, 이곳의 토론 써클에 몸담고 있는 학생과 나, 그리고 같은 클래스의 중국인 학생 이렇게 셋이서 일본어로 토론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대략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토론했는데, 중국인 학생의 일본어가 그리 수월한 편은 아니었지만, 별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내가 '타자'로서 중국을 인지한 것은, 그 중국인 학생이 '타이완 문제'에 대해 너무도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타이완이 '독립'이라는 말을 꺼내는 그 순간이 바로 전쟁이다"라는 그 학생의 발언은, 그동안 양안(兩岸) 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 발언이 어느 정도 일반적인가 물었지만, 그의 답변으로 - 그리고 그 뒤의 나의 조사로 - 알게 되었듯, 그것은 일반적인 중국의 여론이었으며, 극론에도 속하지 못하는 발언이었다. 저우언라이가 나왔다는 난카이(南海) 대학 - 그 친구 말로는, 중국에서 10위 안에 든다고 하는데 - 에서 온 그 학생의 발언은, 중국에서도 제법 배웠다는 사람의 생각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중에 또 기술하겠지만, 이 중국인 친구가 자국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내게 현재 중국의 위치를 보여주는 듯이 보였다. '중국은 현재 자본주의 국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세계에서는 상식선에 속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 친구의 논리는 매우 애매하면서도, 태도는 강경했다. 그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일단 부정했다. 내가 제10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물권법(物權法)을 들먹이자, 그는 그것이 중국 헌법 상에 표현된 권리인 건 맞지만, 중국의 헌법 상으로는 모든 토지가 (원칙적으로) 국가의 소유라는 점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렇다면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가 긍정적인 답변을 한 건 아니다. 수업 시간에도 중국의 종교인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중국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가 했던 발언들에 비추어 볼 때, 그 발언은 중국이 공산주의 일당 독재에 의한 나라라는 무서운 이미지를 벗겨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나는, 중국의 추기경 임명이 교황청이 아니라 중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기사를 예로 들면서 중국의 민주주의가 아직 서툰 단계에 있다는 걸 지적했다. 이런 모순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반대로 그만큼 아직 벗어나지 못한 구태들이 부딪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서, 그들이 대부분 자국에 깊은 자부심을 갖고 있고, 나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말해두고 싶다.

  이런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생각이 보다 깊어진 것은, 타이완 출신의 친구와 친해지면서부터다. 이 친구의 외국인 등록증에, 국적은 '중국 China'라고 적혀 있지, 타이완이라고 적혀 있지 않다. 타이완은 현재 국제연합에 가맹되어 있지 않으며,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도 몇 개 안된다. 중국의 압력이 너무 거세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타이완과 수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고 있는데, 이 친구가 내게 이 점을 지적했을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친구는 타이완의 독립에 대해 비관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과의 통일을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현재 타이완 젊은이의 전형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주는 것인데, 중국의 발전과 미국의 태도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의 자포자기식 발언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던 점은, 타이완 사람들의 일제시대에 대한 태도이다. 중국인의 역사인식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타이완 인의 일제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은 그 방향이 달랐다. '일제시대는 타이완에게 축복이었다'라는 발언이 가지는 울림은, '일제시대는 한국에게 축복이었다'라는 말의 울림과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타이완에서 그 발언은, 나름대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준의 문제도 아니다. 물론 이 말을 '전해준'(본인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 친구가 일본의 구 제국대학 중 하나인 국립 대만 대학에서 왔다는 건, 역사가 만들어 낸 일종의 희극인지도 모른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은, 내가 수업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었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야기를 나눈 20대 초반의 젊은 일본인들은, 1) 지나간 역사에 대해 그렇게까지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 2) 일본인은 군사대국이 되려는 야망이 추호도 없다, 이 두가지를 거의 반드시 이야기했다. 한일 양국의 역사에 대해 꽤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비판적인 의식을 지닌 한 친구마저, '지난 역사에서 일본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 얘기해서는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잖아'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이 문제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있어 매우 흥미로웠던 것은, 역사 인식에 관해 토론했던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내게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싫어해?"라고 물었던 점이다. 일본인은 '미움받는다는 것'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국가적/역사적 차원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나타나는 듯 하다. 나는 이 문제가 거대 담론을 감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작용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들의 발언은 국가적/역사적 차원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2) 일본인은 군사대국이 되려는 야망이 추호도 없다, 라는 발언을 할 때, 뒤에 꼭 따라 붙는 것은 "정치인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이다. "일본국민 누구도, 전쟁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아. 정치인들이 문제지."라는 다른 친구의 발언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 정치인들을 뽑은 사람은 일본 국민이 아닌가'라는 문제를 여러 번 제기했지만,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 불신은 거의 일상화되어 있기에, 내 문제 제기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또한 한일 양국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일본 젊은이들은 '시민 차원에서의 교류'를 이야기했다. 주로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듯이 앞으로도 양 국민이 이야기를 나누면, 양국간의 역사인식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논조이다. 역사인식의 문제에 있어, 정치나 외교 등의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였다.
  이들의 이런 태도는,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인식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한국인 중에, 일본인 개개인을 미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쩌면 이런 문제점들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자주 빚어온 외교마찰의 중요한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도문제는 몇 번인가 거론되었지만, 나로서는 그리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내 나름대로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다"라고 100%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도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 많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국제법 위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 덧붙여 두고 싶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에, 제 29회 국제 학생 심포지움에 같이 참가하자고 권유한 일본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그런 심포지움이 있다는 정보를 몰랐기 때문에 고맙기도 했지만, 보다 심도 깊은 토론과 의견 교환이 가능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도 그랬다. 생활에 적응하고 주로 일본어 공부를 하느라 느슨해져 있던 내 정신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넣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 학생 심포지움은  매년 12월에 열리는 일본 최대의 학생에 의한 토론 이벤트다. 여러가지 주제로 분과회를 나누고, 각 분과회 당 2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해 토론한다. 각 분과회는 2박 3일의 일정 중 1박 2일 동안 4번의 토론회(각 3시간씩 총 12시간)를 열고, 그 결과를 마지막 날 보고회에서 보고한다. 79년 처음 시작했으며,올해로 29회 째를 맞이했다. 작년에는 25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는데, 참가 경쟁 비율은 3:1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처음에 동아시아 분과회를 신청했지만, 자기소개서가 국제관계 위주로 쓰여 있었던 탓이었는지 일본외교 분과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큰 의미를 지니는 일은 아니었다. 외교 분야에 대해 그리 정통하지 못하다는 게 걱정이 되었을 뿐. 사전 심포지움이 두 차례 있었지만, 도쿄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토론회 멤버들과의 첫대면은 공식 심포지움 기간일 수밖에 없었다. 심포지움 전에 날아온 심포지움 자료집을 읽거나, 참고문헌을 들춰보거나 하면서 심포지움을 준비했다.

  12월 21일,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내리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날의 숙취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 정도 토하는 일이었다. 토론회장으로 사용될 곳은, 신주쿠 근처의 올림픽 청소년 센터였다.
  도착해서 만난 일본외교 분과회 사람들은 다들 밝고 명민했다. 이렇게 큰 규모의 학부생 대상 토론회가 흔치 않은 관계로, 학생들 대부분은 도쿄대나 쿄토대, 게이오, 와세다, 츄오 등등, 일본 내에서 꽤나 알려진 학교 출신들이었다. 거기다가 분과회가 일본외교인 관계로, 법학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거기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본 대부분의 학교의 정치학과는 법학부 안에 속해 있었다). 또 그들 대부분이 외무성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소위 엘리트들이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장래 일본의 중추가 될 학생들과 깊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 토론회 참가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여러가지를 배우고 또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군대가 없으니까), 침착하고 노련하게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어떤 한 사람이 토론을 주도하거나(또는 폭주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일 없이, 다들 성실하게 이야기를 해 나갔던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학생들을 모아놓고 토론했을 때, 이 정도로 유연하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그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와 비교하면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반면 안도감도 느꼈다. 내노라 하는 일본의, 그것도 법학과 학생들의 머리라고 해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 비해 특출나게 뛰어나다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론회에 참가할 정도면 이미 어느 정도 토론을 해보았거나 아니면 최소한 관심이 있는 사람일텐데, 책마을 사람들에 비해 그리 커다란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우리 세대는 어느 면에서나 구박을 받아왔지만, 적어도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그 명민함이 뒤떨어지지는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경쟁하며 살아나아가야 할 세대가 그들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심포지움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간략히 각 토론회의 요지를 적는다.

  제 1 토론회 : 제 1토론회에서는 일미 동맹을 다룬다. 최근, 일미 동맹이 다루는 영역이 글로벌화했고, 관계강화가 이루어졌다지만, 일본과 미국이 구하는 이익, 그것을 위한 전략이 항상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전략상의 차이가 생겨났을 때, 현재의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대미추종을 하게 된다는 비판이 많다. 그때 일본이 일미동맹을 하나의 외교 도구로서 이용하고, 주체성을 가진 외교를 전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토론한다.

  제 2토론회 : 제2 토론회에서는,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외교에서 대두하는 중국에 초점을 맞춰 검토한다. 중국은 불투명한 부분이 많은 반면, 지역의 경제발전 및 지역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중국이 일본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어 위협이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 위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일본외교의 올바른 자세를 검토한다.

  제 3토론회 : 제 3토론회에서는, 국제안전보장에 있어서 일본의 역할을 검토한다. 걸프전에서 '수표 외교'라고 야유당하고, PKO 등으로 자위대를 파견하게 된 일본이지만, 현재, 테러의 출현에 의해 일본은 다시 국제안전보장의 새로운 과제를 향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 "평화주의국가"로서, 자위대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검토한 위에, 국제안전보장에 있어서 자위대의 일본의 "평화주의"를 생각한다.

  제 4토론회 : 제 4토론회에서는, 제 1토론회에서 제 3토론회까지의 내용에 입각해, 21세기에 있어서 일본외교의 방향성을 모색한다. 액터(Actor) 간의 이해관계가 다원적으로 얽혀 있는 현대의 복잡기괴한 국제사회. 그런 파란만장한 국제정치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일본은 금후, 국제사회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하는 것인가. 본 토론회에서는, 일본외교의 강점과 약점, 복수의 외교지침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 등을 검토한 위에, 21세기를 향한 일본외교의 신항로를 개척한다.


  토론회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적는 건 무리다. 토론회만으로 12시간(4토론회*3시간)에, 보고회를 준비하는 둘쨋날 밤에는 결론을 내기 위해 새벽까지 토론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일일이 적기보다는, 내가 어떤 점에서 인상을 받았고 어떤 게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를 서술하는 편이 나을 듯 싶다.
  각 토론회의 요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외교는 기본적으로 '일미동맹'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전후부터 줄곧 지속되온 일본외교의 근간이며, 최소한 90년대 초까지는 일본외교의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랬던 것이, 공산권이 붕괴하고 중국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외교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제로도 토론회에서 일미동맹 이야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동아시아 지역 외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인 내가 심포지움 내내 생각했던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가 일본외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작다는 점이었다. 참가자 중에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기에 한일 관계가 어느 정도 논의되었지만, 그것도 대부분 북한의 위협과 관련된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다. 일본외교에서의 '한국'은, 내가 없었더라면 아마 완전히 논의에서 배제되었을 정도로 사소한 위치였다. 세계 경제가 재편되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이 한국외교에 미칠 영향력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부생의 토론이 학계 토론의 축소판이며, 사회 여론의 반영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충격이었다.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현재 일본외교가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대상은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커다란 나라였다. 양안 문제(중국과 타이완의 문제) 역시, 중국이 위협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하나인 타이완을 지켜야 한다는 공세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타이완이 점령당했을 경우 초래될 손해와, 그 후 중국과의 관계를 줄곧 논의했다는 얘기다. 일본은 이전의 '미국' 중심 일극 외교에서, '미/중'이라는 이극 외교로 탈바꿈하려는 듯이 보였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각국의 외교적 가치를 (물론 일본의 입장에서) 평가할 때의 태도였다. 타이완과 베트남은 현재 GDP에서 5배 이상 차이가 날 정도로, 경제력에서 비교가 안된다. 그러나 토론회에서 두 나라의 평가의 중심은, 현재의 경제력이 아니라 앞으로의 잠재력이었다. 타이완의 인구는 3천만 정도이지만, 베트남의 인구는 현재 7천만 정도이며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인구가 경쟁력이 될 앞으로의 사회에서 이런 동남아시아 국가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라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일본 국내의 문제에서는, 자위대와 '평화주의'의 문제가 가장 많이 거론됐다. 이른바 '평화헌법'을 개헌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논의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현재 자위대의 활동이 합헌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그 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일본외교에 대해 동아시아 각국이 느끼는 이중성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들 공감하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바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애매함'은 일본외교의 약점이자 강점일지도 모른다.

  토론회 뒤의 보고회에는, 마지막 날 발표형식으로 각 분과회 당 5분 간 진행하고, 그 뒤에는 부스를 세워서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관람하고,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일본외교 분과회가 가장 많이 공격당한 부분은, 중국이 어째서 위협이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런 질문은 대부분 중국인 참가자에게서 나왔다. 확실히 중국인은, 적어도 그 토론회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자신의 모국이 세계에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이 점을 더욱 뼈저리게 인식한 건, 동아시아 분과회 부스에서 질문했을 때였다. 나는 전부터 한국과 중국의 역사교과서가 국가기관이 발행한 단일종인 것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점을 중국인 참가자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분과회의 중국인 참가자는 두 명이었는데, 내 질문을 듣고 굉장히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너무 장황하기에 중간에 자르고, "역사교과서가 여러 종이어야 한다는 건, 민주국가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자, 두 중국인 중 한 명이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라고 대답했다. 그 참가자들보다 오히려 내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독재이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하는 개념이라는, 미소 냉전 시기 공산주의자가 열을 올려 설명했을 법한 이야기를, 현재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자본주의화 된 나라의 학생이 다시 한 번, 세계에 몇 안 남은 공산주의 국가 중 하나인 중국의 대학생에게 설명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다행히 다른 한 명은 국제정치를 전공한 덕분에 자기의 친구가 한 충격적인 발언을 서둘러 수습했다. 배고픈 어린아이에게 이런 저런 다양한 먹을 것을 주면 탈이 나듯이, 지금 중국에 민주적인 여러 제도는 필요하지만, 단계적으로 실시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나름대로 수긍했지만, 그 중국인 학생 둘은 그 뒤에도 내 쪽을 보며 수근거렸다, 라기보다는 분통을 터뜨렸다.

  심포지움 후의 얘기는 개인적인 일이 되기에, 별로 말할 것이 없다.


  심포지움에서 만난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막연히 어두운 전망만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토론을 통해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은, 그저 씁쓸하게 박수쳐 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인들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그들에게 타국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근본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양안 문제에 대해 짧은 시간 내에 흥미를 가지고 조사할 수 있었던 건, 그게 한국의 상황과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많은 일본인들에게는, 그 사람이 정치학과 학생이라 하더라도, 다른 나라의 정치상황을 그 나라의 관점에서 고려하고 판단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단지, 일본이 먼저 말을 걸면, 대화를 청하면, 돈을 주면(토론에서 중요한 안건 중의 하나가 일본의 ODA - 정부개발원조 - 자금 문제였다)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평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정치에 대해 거의 아무런 기대를 걸지 않는 나라는, 결국 정치를 통해 바꿀만한 것이 거의 없는 나라와 같다. 어쩌면 이건,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의 유물론적 한계일런지도 모른다.
  홋카이도보다 약간 더 클 뿐인 남한에서 나고 자란 내가, 희망을 보는 건 바로 이런 지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쌓여 온 한국의 모든 폐해들이 한 순간에 폭발한 뒤의 잔해 속에서 성장했다. 여기에 우리의 절망이 있고 동시에 구원이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이런 상황 속에서 더 날카로워질 수 있고, 보다 더 단련될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지 암중모색할 장을 가질 수 있었다. 그건 우리가 배불렀다면 결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작년 7월 중순까지 자본론을 읽고 있었을 때의 문제의식과, 지금의 나의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바꾸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그 방법은 유물론적인 바탕 위에 서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그 방향성에 있어서는, 보다 다양한 방향과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 일국 안에서의 방법이 아니라, 여러 나라들 간의 관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해법 같은. 이건 물론, 일본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접하고 느끼면서 받은 영향이리라.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이전 세대가 저질렀던 일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면서, '지속가능한 혁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섣불리 무언가를 결정하고 추진하기보다, 당장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각론 속에서 헤맬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 안에서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서로를 비난하고 괴롭힐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지금 당장 세상을 뒤집어 엎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안테나가 되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 세대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건 내가 우리 세대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발신이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서로 답신을 주었으면 싶다. 전에도 말했듯이,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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