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밑줄:인용자)


- 김수영,『김수영 전집 2-산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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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초년 시절, 경영학을 전공하는 한 후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같은 걸 왜 읽는 거죠? 다 거짓말이고 뻔한 이야긴데, 읽어서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어요."
  꼴에 문학도라고, 어떻게든 답변을 해주려 했지만 결국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 뒤로 저 질문은 나를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시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문학의 효용이란 게 사실 별 게 아니다. 읽고 눈물 줄줄 흘리는 것이 효용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즐겁게 껄껄 웃고 지나가는 것이 효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것이 허구라 할지라도 현실이 되기를 지향하면서 글을 쓴다. 그것도 작품의 표면적인 것이 현실이 되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품 속에서 드러내고자 한 일말의 진실이 현실의 세계에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쓰는 것이다. 자꾸 되풀이해서 소리높이다보니 이루어지는 헛소리의 기적. 시의 기적. 문학의 기적. 저항문학도, 참여시도 그런 의미에서 이루어져 왔다. 김수영의 저 문장들은, 내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숙제를 상당부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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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대현 2006/06/04 12:32 댓글주소 | 수정 | 삭제 | 댓글

    난 그래서 그 간절함을 어떻게든 안 간절함으로 위장하려는 사람이 맘에 안들어. 마치 자기가 정말 안 간절한 것처럼 행세하려 드는 사람들이.
    그래서 어쩌면 자유주의자 해먹기가 가장 힘든 게 아닐까, 란 생각도 들어. 뭘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구별되지 않으니까.